MPU(초소형연산처리장치)는 PC의 두뇌에 해당되는 가장 중요한 반도체다.

값도 가장 비싸다.

미국의 인텔사는 이 MPU시장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세계최고기업중
하나이다.

전세계직원은 4만3,000여명.

94년 매출액은 미화 115억달러에 달한다.

인텔은 왜 강한가.

일본은 왜 인텔을 따라잡지 못하는가.

최근 일본에서는 미국 반도체산업의 심장인 인텔사의 역사를 고든 무어
회장의 행적을 중심으로 조명한 "인텔과 함께"(옥하직사저 일본경제신문사
간)가 출간돼 화제를 낳고 있다.

"고든 무어, 나의 반도체인생"이라는 부제를 단 이책은 미국에서 어떻게
창조적인 연구자가 길러지고 벤처비즈니스가 창설되며, 벤처캐피털이 이를
어떤 방식으로 지원하는지를 인텔의 창업과정 중심으로 소개함으로써 특히
주목을 끌고 있다.

고든의 창업과정은 이렇다.

56년초 트랜지스터 발명자인 윌리엄 쇼클레박사로부터 무어에게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왔다.

쇼클레박사는 당시 상업용트랜지스터 생산회사 설립을 위해 미국에서 젊은
기술자를 스카우트하려는 참이었다.

무어는 당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대학연구실에 근무하면서 새로운 일을
찾는 중이었던 만큼 그 분야에서 유명한 쇼클레의 요청에 쾌히 응했다.

연구는 순조롭게 진행됐으나 인사관리상 분쟁이 일어나 무어와 8명의
연구자가 회사를 그만두었다.

이 8명은 훼어차일드 카메라&인스트루먼트사의 후원을 얻어 57년
훼어차일드 세미콘닥터사를 설립했다.

이들은 설립 1년뒤 IC를 발명했으며 트랜지스터IC의 성공으로 세미콘닥터사
는 60년대후반까지 세계최대의 반도체기업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상하간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하게 이뤄지지 않는등 대기업병의 징조
를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에 염증을 느낀 무어와 그의 동료 노이스는 훼어차일드를 그만두고
새 회사 인텔을 설립한다.

68년7월의 일이었다.

이때 노이스는 40세, 무어는 39세였다.

자금은 무어와 노이스가 각기 50만달러씩 출연했다.

나머지는 세미콘닥터사 설립때 도움을 줬던 벤처캐피털회사가 부담했다.

인텔은 당초 메모리회사로서 시작했다.

그러나 85년 메모리사업을 그만두고 MPU로 옮겨간다.

일본기업의 공세와 전자메일의 등장으로 메모리사업에는 희망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신 창의력과 아이디어가 필요한 MPU에 주력하기로 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일본은 메모리 판매에 급급, MPU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컴퓨터기술의 발달에 따라 386, 486, 펜티엄, 펜티엄프로등이
쏟아지면서 인텔은 세계최대의 반도체회사로 급부상했다.

저자는 일본의 경우 시험전쟁, 연공서열과 규칙 중심정책으로 인해 창의력
을 요구하는 MPU사업에 빨리 뛰어들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일본기업의 집중호우형 과당경쟁체질의 폐해가 얼마나 큰지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 오춘호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