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래선경이라? 신선들이 사는 봉래산이라는 말이 아닌가.

보옥의 뇌리에는 경환 선녀를 따라 들어가 보았던 태허환경의 궁전
누각이 어른거렸다.

수정 구슬들로 촘촘히 땋아 내린 주렴,고운 무늬가 돋을새김으로
들어가 있는 문발, 갖가지 형태로 우람하고 정교하게 빚어낸 용마루와
처마등, 황홀하기 그지없던 그 궁전이 후비 별채 정전을 보자 보옥의
머리속을 가득 채웠다.

그때 마음에서 우러나던 시구절도 지금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보옥이었다.

햇빛 어린 주홍 대문 눈부시게 빛나고 주옥으로 만든 창문 수정같이
반짝이니 마루는 금판이요 기둥은 옥돌이라 기화요초 향기 속에 백옥루가
우뚝 섰네 그 궁전에서 백가지 꽃술과 만가지 나무진, 기린의 골수,
봉화의 젖으로 빚어 만든 만염동배라는 술을 선녀들과 함께 마시며
"홍루몽"열두곡을 듣지 않았던가.

그 홍루몽 곡들중 제3곡이 유난히 애절하게 들리던 생각이 났다.

그 제목은 "한무상"이었다.

즉, 인생은 한스럽고 무상하다는 뜻이었다.

부귀영화를 한창 누리는데 느닷없이 죽음이 찾아드니 인생은 한스럽고
무상하도다 애달파도 할 수 없이 세상 만사를 버리고 영혼만이 저
먼 곳으로 떠나가네 떠나며 바라보니 산은 높고 고향길 아득하여
부모님의 꿈속에서나 찾아뵈오리 이 몸은 황천으로 가옵나니 그리운
분들이여 저 세상에서 만나오리다.

태허환경의 선경에서 그 "한무상"곡을 들을 때는 하도 슬픈 곡조라
오히려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지금 보옥이 화려한 후비 별채 정전앞에
서 있으니 불현듯 "부귀영화를 한창 누리는데"라는 가사가 생각나면서
뒤이어 "느닷없이 죽음이 찾아드니"라는 가사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다음 순간, 보옥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홍루몽 제3곡 "한무상"은 바로 후비가 된 보옥의 누나 원춘의 운명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원춘 누나는 후비로 한창 부귀영화를 누리는 중에 갑자기
죽게 된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선녀들이 노래로 예언한 원춘의 운명을 알 리 없는 가정과
문객들은 그저 정전의 화려함에 취하여 이름짓기에 여념이 없었다.

선경에서 그 애절한 "한무상"노래를 들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인생무상을
새삼 느낀 보옥이 그런 허무한 마음때문에 경환 선녀의 여동생 겸미의
몸을 더욱 탐했는지도 몰랐다.

겸미의 몸속으로 들어가 노닐 때의 극락은 또 하나의 선경이라 아니할수
없었다.

하지만 그 선경도 결국 태허하였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