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철 <성균관대 교수.경제학>

노태우 전대통령의 비자금문제로 온나라가 홍역을 앓고 있다.

스스로 조성한 자금이 5,000억원대에 이르며 이중 1,700억원이 남아
있다고 밝혀 국민들을 분노케 했다.

국민여론이 들끓게 됨에 따라 헌정 사상 유례없는 전직 대통령의
검찰출두라는 오명도 쓰게 됐다.

한편 검찰의 수사가 진행되면서 비자금을 실명전환해 준 기업들이 확인
되고 있어 재계와 금융계가 잔뜩 긴장하는 모습들이다.

앞으로 비자금의 전모는 더 밝혀지겠지만 이번 6공 비자금사건은 우리
나라의 정치와 경제에 엄청난 주름살을 안길 것 같다.

이미 발표된 것만 보더라도 적지 않는 금융기관이 이번 사건에 연루돼
있다.

그래서 앞으로 금융기관에도 한차례 세찬 사정바람이 불어 닥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번 비자금사건을보면 두가지의 큰 특징이 있다.

하나는 대통령이 재직시 조성한 비자금을 퇴임후에도 계속 관리하다
발각됐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노씨 자신이 밝힌 것만해도 비자금의 규모가
사상최대라는 점이다.

이번 사건이 우리나라 금융산업에 엄청난 영향을 줄 것이란 점을 감지할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검찰이 비자금 수사를 계속하는 동안 사채시장은 움츠러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채에 의존하고 있는 많은 중소기업들은 한층 더 자금난을
겪게 될 것이 뻔하다.

이렇게 될 경우 통화당국은 신축적인 통화관리로 대처해야 한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계기로 모든 정치자금이 수면위로 떠오르고 그래서
고질적인 사채시장과 지하경제가 크게 줄어든다면 오히려 우리의 금융산업은
새로운 전기를 맞을 수도 있다.

우리나라 금융산업은 다른 산업에 비해 매우 낙후돼 있다는 지적이 그동안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금융산업은 다른 개도국에도 뒤떨어진다는 평도 적지
않았다.

우리나라 금융산업의 구조와 골격은 전형적인 후진국형이다.

은행은 준정부기관이며 은행원은 준공무원으로 인식돼 왔다.

경제논리가 아닌 정치논리가 금융산업을 지배해온 결과이다.

우리나라 금융의 또다른 문제는 금융의 하부구조가 제대로 확립돼 있지
않다는 데에 있다.

통화는 곧잘 사람의 혈액에 비유되곤 한다.

피는 혈관을 통해 흘러가며 체내 곳곳에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한다.

혈관속에 과다한 혈액이 급하게 공급되면 고혈압을 일으키고 그 반대면
빈혈증상을 가져온다.

마찬가지로 통화도 통화관을 통해 흐르며 경제전반에 걸쳐 필요한 자금을
공급한다.

통화의 과잉공급은 금리를 내리거나 인플레를 유발하고 통화의 과소 공급은
금리를 오르게 한다.

그래서 통화당국은 금리의 움직임을 통해 통화량의 적정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통화관리 시스템에는 큰 하자가 있다.

통화관에 무수히 많은 구멍이 나있거나 부식돼서 아예 없어진 부분도 많다.

그래서 통화가 한번 방출되면 다시 금융기관으로 환류되지 않고 사채
시장이나 지하경제로 흘러가 버리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는 금리와 통화량이 따로 움직이게 되며 정부는 자금시장의
수급을 반영하는 정책지표로 금리를 사용할 수 없다.

이런 때에 국내 금융시장을 개방해 해외 자금이 마음대로 들락거리면
감당하기 힘든 금융혼란이 생길수 있다.

이렇듯 우리나라 금융산업의 하부구조가 부실한 가운데 금융정책의 수립과
금융기관의 운영에 있어서는 경제논리보다 정치논리가 지배해 왔다.

과거의 절대권력은 금융정책을 주관하는 금융통화위원회를 금융통과
위원회로 전락시켰다.

금융기관의 수장들은 최고 권력앞에 맥없이 무너져 내렸고 인맥을 이용하여
사단을 조직했으며 떳떳하지 못한 일에 개입하기도 했다.

국내 금융산업이 낙후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다.

대부분의 국내 은행은 지금 부실채권과 각종 규제때문에 경쟁력이 크게
약화돼 있다.

이에 비해 한국에 진출해 있는 100여개의 외국은행들은 국내에서 잘 훈련
받은 금융인을 발탁, 짭짤한 수익을 내고 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지난 80년대초부터 금융의 개방화와 국제화를 위한
정부조치가 있어 왔다는 사실이다.

특히 문민정부에 들어와서 금융실명제를 실시한 것은 매우 획기적인
일이다.

이번 6공 비자금사건은 우연히 불거져 나온 것이 아니다.

결국은 금융실명제의 위력때문에 덩치큰 비자금이 수면위로 떠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금융의 하부구조부터 새롭게 정비해야 한다.

또 금융산업 환경의 변화에 맞춰 중앙은행의 기능도 정상화하고 잘못된
금융관행을 바로 잡아야 한다.

그리고 정치가 금융을 지배하는 시대를 우리는 마감해야 한다.

권력과 결탁된 거대한 비자금이 금융시장과 주식시장, 그리고 부동산시장을
헤집고 다닌다면 우리경제는 더이상 활력을 지닐 수 없게 된다.

중소기업의 자금문제도 물론 해결될 수 없다.

이번 사건은 우리경제에 커다란 파문을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비자금에 대한 철저한 수사가 이뤄져 지하경제가 크게 위축되고
양성화된다면 우리나라 금융산업은 새로운 발전 전기를 맞게 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