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면 벽에는 널판자 조각 외에 여러 용도의 시렁들이 붙어 있었다.

책을 놓아두는 곳, 솥을 걸어두는 곳,붓과 벼루를 넣어두는 곳,
꽃병을 세워두는 곳, 화분을 두는 곳 등등이 따로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각종 색을 넣은 그 시렁들은 용도에 따라 어떤 것은 네모진 모양,
또 어떤 것은 둥근 모양, 해바라기나 파초잎 모양, 이어진 고리 모양,
반달 모양 등등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언뜻 보기에 꽃밭 같기도 하고 색비단을 펼쳐놓은 것 같기도
하였다.

"저기 오색 견사를 펼쳐놓은 것은 무언가?"

사람들이 다가가 만져보려 하다가 깜짝 놀랐다.

"이건 들창문이잖아. 어쩌면 이렇게 감쪽같이 속아넘어갈 정도로
만들어놓았을까"

사람들이 혀를 차며 감탄을 발하였다.

"저기 무늬들이 박힌 비단을 드리워둔 곳은 무언가?"

사람들이 다가가 보니 그건 지게문이었다.

지게문 하나도 그냥 소홀히 만들지 않고 온갖 기교를 다하여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벽에는 널판자 조각과 시렁 이외에 각종 골동품과 거문고,
보검, 병, 탁상병풍 같은 것들이 걸려 있기도 하였는데, 희한하게도
그것들이 벽에서 튀어나와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사람들은 벽 전체가 하나의 장엄한 예술품처럼 꾸며져 있는 것을
보고는 열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일행이 첫번째 방에서 두번째 방으로 가려다가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왼쪽 문으로 해서 나갈까 오른쪽 문으로 해서 나갈까 하다가 오른쪽
문을 택하여 나갔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큼직한 서가가 우뚝 앞을 가로막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다시 발길을 돌려 왼쪽 문으로 해서 나가 보았는데 또 이건
무슨 일인가.

일행과 비슷한 숫자의 사람들이 저쪽에서 우르르 몰려오는 것이
아닌가.

후비 별채에 다른 사람들이 들어왔을 리가 없는데. 일행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 사람들에게 길을 비켜주려 하다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 멈칫 서보았다.

그러자 그 사람들도 다 같이 멈춰섰다.

"아니, 저건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그러게 말이야. 저 얼굴도 그렇고"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라니. 바로 자네 얼굴이야. 하하하. 우린
큰 거울 앞에 선 거라구"

아닌게 아니라 큰 거울이 바로 앞에 서 있었다.

"깜짝 놀랐네. 후유"

가정이 거울로 다가가 그 표면을 손으로 쓰다듬어 보았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