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해를 내려보는 이스라엘쪽 서안에 우뚝 솟은 맛사다라는 산이 있다.

이곳은 유태인들이 로마의 "후라비우스실바"장군이 이끄는 정예 제10군단과
오랜동안 치열한 사투를 벌인끝에 전원 옥쇄한 곳으로 유명하다.

다빗왕에 의해서 유태국이 통일된 것이 B.C1004년, 그 이후 바비로니아
그리스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유태인들은 그들의 성지 예루살렘을
구하려고 투쟁하다가 A.D66년에 드디어 대로마제국에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군사대국인 로마와 싸워서 이길수 있는 승산은 애초부터 없었다.

유태케릴라부대가 싸움끝에 쫓겨서 마지막으로 방어진을 구축, 농성한
곳이 바로 이 "맛사다"산이었다.

병력숫자로 보나 장비로 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로마군의 포위속에 항전
하기를 3년, 수비대의 군량도 바닥나서 더 이상 버틸수 없게된 마지막날,
지도자 "에네아잘"의 최후연설이 있은후 수비대전원이 포로가 되기보다는
죽음을 택하기로 결의하고 추첨을 해서 10명을 뽑았다.

이들의 역할은 나머지 전원과 그 가족을 참살시키는 것이었다.

남은 10명은 다시 1명을 제비뽑아 9명을 죽었고 마지막 1명도 자살하고
말았다.

산을 점령한 "로마군을 맞이한 것은 정연하게 누워 있는 960명의 시체
뿐이었다.

그당시 제비뽑기에 사용되었던 도자기 조각이 지금도 남아있고 이 조각들
에는 한결같이 한사람의 필체로 죽은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다.

이 "맛사다"의 비극과 항쟁정신은 이스라엘인들의 오랜 가혹한 방랑의
역사를 통하여 가슴속에 트꺼운 불씨로 남아있고 역경을 헤쳐나가는 정신적
배경이 되어 있다고 한다.

뮌헨올림픽때 그리고 74년의 "마-롯트"촌사건때도 이스라엘 선수, 또는
어린 학생들이 사살, 희생되는 것을 무릅쓰고 아랍게릴라와 끝내 타협하지
않고 이들을 몰살시킨 것을 이러한 정신에 연유하는 것이다.

최근의 "라빈"수상 서거후 이스라엘이 어떤길을 갈것인지 궁굼하게 여기는
사람은 비슷한 고난의 역사를 겪어온 한국인으로서 필자 혼자만일까?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