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민 < 편집부국장 >

"수치.허탈.착잡.참담..."

우리나라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씨가 구속되던 날 시민들의 표정을 묘사한
말들이다.

엄청난 뇌물을 거두고 그돈으로 보통사람들도 낯부끄러워 해야할 사채놀이
와 부동산투기를 했다는 믿기지 않은 현실앞에서 치욕스런 역사를 어떻게
감당해야할지 걱정스런 모습들이었다.

그나마 이것으로 끝이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하는 현실이 더욱
안타깝기만 하다.

언제 어디까지 갈지모르는 혼란스런 모습에 고개를 가로 저어보지만 이
정도로 덮어두자고 할 수도 없는 오늘의 상황은 서민들 가슴을 짓누르기에
충분하다.

정치권 소용돌이는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같고 가뜩이나 어려워지는 경제에
찬물을 끼얹어 놓았으니 싸늘하게 식어가는 경제체온에 추워지는 것은
백성들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자는 적극적인 대안제시도 나오고 있지만 과연 어떤
식으로 풀어 나가야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그다지 떳떳하다고 느껴지지않는 정치권의 이전투구는 국민들의 눈에 곱게
비칠 턱이 없다.

아무리 대통령의 권위앞에 꼼짝할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엄청난 액수의 돈을
기업외부로 유출시킨 기업들의 책임도 자숙하는 모습하나로 모든걸 끝낼
수는 없을 것이다.

정부의 반응은 어떤가.

잽싸게 대응책을 마련하겠다고 나섰다.

"정경유착근절방안"이라고 이름붙였다.

대기업소유주가 경영을 마음대로 할수 없도록 규제와 견제장치를 마련
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정부스스로 실효성이 없다해서 철회한 외부이사제.사외감사제등이
포함돼 있다.

좋지않은 의미에서의 정경유착은 단절돼야 마땅하고 잘못된 대기업들의
경영행태도 고쳐져야 한다.

그러나 그방법에 있어서 정부규제를 통한 인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는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비리는 규제를 먹고 산다"고 했다.

규제하는 수단이 많아지고 힘이 세지면 그만큼 로비가 성행하고 비리도
극성을 부리게 마련이다.

이번 사건을 두고 사람뿐만아니라 "법과 제도도 구속수사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일 것이다.

기업규제를 과감하게 풀어 비리발생의 근원을 봉쇄하는 것이 근본적인
처방인 셈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유시장경제체제의 기본방향과 질서를 보다
확고히 하고 이같은 방향에서 정경유착이나 비리척결의 해법을 찾아야 한다.

시장경제의 핵심은 경쟁융통한 효율이다.

기업상호간에 경쟁을 통해 견제가 이뤄지도록 하고 성과에 대한 제재는
소비자와 국민들이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흔히 최고의 선으로 논의되는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과연 한국적 현실에서
어느만큼 타당한가, 이의 실현을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유효한가도 깊이
생각해야될 문제들이다.

가진자에 대한 맹목적 불신, 이를 이용한 정부의 인기영합적인 경제정책
등은 경계해야할 대상이다.

한가지 덧붙인다면 자본주의 발전의 원동력인 기업의욕을 꺾는 어떠한
조치도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우리경제는 내리막길에 들어서 있다는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자칫 이번 사건을 계기로 급속하강의 우려마져 제기되고 있다.

치열한 국제경쟁에서 땅에 떨어진 국가 기업 한국경제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어려움을 더욱 가중 시킬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비리척결의 결연한 의지도 초미의 관심사이기는 하지만 급격한 경제위축도
걱정해야할 대목이다.

경제계 특히 대기업그룹들은 사회적 책임의 재정립과 함께 중소기업지원
등을 통한 경제회생의 노력을 더욱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경제는 그 주체가 되는 기업이 스스로 서 택하고 그 결과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

정부를 포함한 정치는 이를 끌어주고 밀어주는 봉사의 기능을 하는 것이
자본주의 속성이다.

굳이 이름붙이자면 좋은 의미의 정경유착이다.

이는 갈수록 팽배해지는 정치에 대한 불신과 냉소를 씻을수 있는 길이라고
도 생각된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