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시 노원동 3공단인근에 위치한 삼성제침은 가족적인 사랑이
어우러져 따스함을 느끼게 하는 공장이다.

회사정문에 들어서면 종업원들이 서로 인사를 하며 웃음을 짓는 모습을
쉽게 볼수 있다.

편직용 바늘을 생산하는 이 회사의 이름과는 아주 다른 분위기이다.

밖에서 보는 공장의 단순한 외관과는 달리 삼성제침은 이 분야에서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독일과 어깨를 겨룰수 있을 정도의 기술력으로
훌륭한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이 회사는 미국을 비롯 이탈리아 영국등 30여개 국가에 제품을 수출하고
있다.

특히 동남아 시장의 점유율은 30%를 넘고 있을 정도이다.

삼성제침도 한때 노사갈등을 겪었으나 이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만든
회사이다.

지난 91년 10여년동안 지속되어온 노사협의회의 기능에 불만을 가진
근로자들은 노동조합을 탄생시켰다.

당시 새로 설립된 노조는 유니온샵의 실시, 전임자인정, 회사의
경영자료공개 등을 요구하면서 사측과 사사건건 대립했다.

2개월동안 격전을 치르면서 회사측은 노조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쪽으로 자세를 바꾸었다.

회사측은 노조를 이끄는 사람들이 10년이상의 장기근속자들이어서
노조의 요구가 합리적일 수도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특히 회사측은 노조설립을 계기로 노사간의 신뢰를 조성하고 노.노간의
갈등을 사전에 막는다는 차원에서 유니온샵까지 과감히 인정했다
회사측은 경영자료도 노조에 공개했다.

그이후 1년동안의 협상과정에서 회사측은 노조의 요구와 행동이
합리적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으며 노조를 대등한 파트너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노조도 어용성 시비에 아랑곳하지않고 회사의 경영실적범위내에서
임.단협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그 결과 임.단협이 한달을 넘기는 일이 없어졌다.

노사양측은 매분기마다 노사협의회를 통해 회사의 생산 인사 근로복지
등 전반적인 경영문제를 토론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지난해부터는 사용자와 현장부서 근로자간의 간담회를 매주 1회씩 열어
경영진이 직접 근로자들의 고충을 해결해 주고 있다.

이 회사는 신입사원을 채용할때 노동조합의 면접을 거쳐야하는 독특한
제도를 갖고 있다.

인사권한의 일부가 노조에 위임이 되어있는 셈이다.

같이 일할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회사측은 복지증진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산악회와 조우회 등 사내써클에 대한 지원은 물론 중.고생자녀 학비지원
모범사원 해외연수까지 실시하고 있다.

장기질병자와 부상자에게 통상임금의 60%를 지급하고 있다.

이 회사의 임금수준은 동종업계의 선두자리를 유지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 수준에 만족하지 않고 다른 회사와 비교하면서 이의를
제기하는 조합원들이 나타났다.

주태화 노조위원장은 "우리회사는 우리회사일뿐"이라는 논리를
전개하면서 "왜관의 2공장건설과 본사 이전 등으로 가뜩이나 자금사정이
어려운 상황에서 더 이상 무리한 요구를 해서는 안된다"고 조합원들을
설득해 나갔다.

주위원장는 "매출신장없이는 임.단협에서 요구할 것이 없다"며 생산성
향상운동을 전개했다.

이 회사노조는 내년중반 왜관공장으로 본사를 이전하면서 예상되는
생산차질을 보충하기위해 물량확보에 나설 계획까지 세워놓고 있다.

송인춘 회장은 "현재의 공장시설로는 채산성이 떨어지지만 내년에
왜관의 새 공장준공후 부가가치가 향상되면 새로 창출되는 수익은
근로자들에게 돌릴 것"이라고 강조한다.

앞으로 다공정 자동화기계를 도입한후에도 인위적인 감원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회사측의 방침이다.

그동안 함께 고생해온 근로자들과의 공동운명체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삼성제침은 지난해 매출실적 1백30억원을 돌파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회사는 이 수준에서 만족하지않고 내년중 왜관의 새공장건설을
계기로 현재 10%에 머물고 있는 세계시장점유율을 오는 2000년까지
20%선으로 끌어올린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이 회사는 현재 세계최고의 기술을 가진 독일을 뛰어넘기 위한 연구를
한창 진행중이다.

공동운명체의식을 바탕으로 한 노사협력이 원동력이 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앞으로 5년후면 세계수준으로 올라설 수 있다는 송회장의 말에서
야심에 차있는 이 회사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었다.

< 대구 = 신경원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