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 지방의 그 관리는 달아이를 살리기 위해 여러차례나 체신 출가용
으로 다른 아이를 사서 절간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그러나 딸아이의 병은 차도가 없었다.

결국 딸아이 본인이 출가를 하여 절간으로 들어갈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딸아이의 병이 나아 그후 계속해서 머리를
기른채 절간에서 수업을 받게 되었다.

묘옥이라는 법명도 받았다.

어느새 묘옥은 열여덟살이 되었다.

그동안 부모님들은 세상을 떠나고 묘옥 옆에는 시중을 드는 할멈이
두사람, 몸종이 한사람 남아 있을뿐이었다.

묘옥의 얼굴과 자태는 한껏 열여덟의 젊음을 발산하며 탐스런 꽃처럼
피어나 있었다.

누가 보아도 눈이 어찔할 정도로 미인이었다.

묘옥은 스승을 따라 지난해 장안으로 올라왔다.

그것은 장안 도읍에 관음보살의 유적과 패엽유분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패엽유문이란 바이다라 나뭇잎에 쓴 고대 인도의 경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런 유적과 유문을 들러보며 불심을 더욱 돈독히 하기 위해 서문밖
모니암이라는데 기거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해 겨울 묘옥의 스승인 그만 병을 얻어 열반에 들고
말았다.

선친신수(천지만물의 생장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에 능한 스승은
죽기 전에 묘옥에게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으면 내 영구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겠으나, 너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말고 여기 그대로 머물러 있으라.

그러면 네가 발붙일 마땅한 처소가 생길 것이니라"

그 스승의 유언대로 묘옥은 여전히 모니암에 머물며 좋은 처소가
생기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욕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왕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더니
묘옥과 같이 가문 있는 집안의 사람을 데려오려면 정중하게 초청장을
써서 보내야 한다면서 임지효의 아내에게 그렇게 하도록 지시하였다.

사람들은 후비 별채 원내의 마무리 공사를 위해 눈코뜰새 없이
바빴다.

짐승을 사들이는 소임을 맡은 사람은 학과 공작, 사슴, 토끼, 닭,
거위들을 구입하여 그것들은 주변 경치를 고혀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하였다.

그런 새와 가축들은 풀어놓자 후비 별채 원내는 더욱 활기가 넘쳐
보였다.

우아한 몸짓으로 학들이 날아오르고, 공작들이 화려한 깃털을 활짝
펴고, 긴 목을 한 사슴들이 그 맑은 눈을 굴리며 달음박질을 하고,
토끼들이 깡총깡총 뛰어다나며 풀들을 뜯어 먹었다.

닭과 거위들도 우리를 넘나들며, 비로소 살아 움직이는 것들이 후비
별채를 채운 셈이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