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그룹들이 기획조정실장을 잇달아 교체해 눈길을 끈다.

지난 9월 현대그룹이 종합조정실장을 박세용 종합상사 사장으로 전격
교체한 것을 시발로 최근 동양 코오롱 두산 진로 미원 아남 등이 기조실장
을 줄줄이 바꿨다.

이달중 정기 인사가 예정돼 있는 삼성 LG 대우 등 대기업그룹중 몇몇
곳에서도 기조실장 교체설이 나오고 있다.

기조실장은 그룹회장의 최측근으로 각 계열사의 경영을 총괄 관리하고
종합적인 기획을 담당하는 요직중의 요직이다.

회장의 의중을 정확히 짚어내 계열 각사의 경영에 반영시키는 일도
기조실장의 몫이다.

이 때문에 기조실장은 흔히 ''참모총장''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어떤 성향의 인물로 보임되느냐에 따라 해당 그룹의 전체적인 경영 방향
을 엿볼 수도 있다.

재계는 주요 그룹들이 이처럼 "역할"이 큰 기조실장을 다투어 바꾸고
있는 배경을 궁금해하고 있다.

단순히 "우연"의 연속일 수 만은 없을 것이라는 관측에서다.

더욱이 "공교롭게도" 새로 바뀐 각 그룹의 기조실장이 하나같이 일선
계열사에 몸담으면서 국제영업 기획 등의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실무형"
이라는 점이 주목되는 현상이다.

전임 실장들이 대체로 기조실에 오래 몸담았던 전형적인 "비서형"
이었다는 점과 대비돼 더욱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각 그룹이 단순히 인물을 바꾼 데 그치는 게 아니라 그룹 경영의
전반적인 기조에 일대 변화가 뒤따를 것임을 예고하는 것으로 재계는
보고 있다.

"비서형에서 실무형으로"의 교체라는 공통 인자는 대기업그룹들의
경영이 이제까지의 "오너 친정체제"에서 "각사 분권경영"쪽으로 빠르게
옮겨갈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지적이다.

예컨대 현대그룹의 박세용신임 종조실장은 종합상사 상선 등 2개
계열사의 사장을 겸직하고 있는 "야전맨"이다.

그룹내의 대표적인 국제통이기도 하다.

전임 심현영실장이 관리 전문가로 분류됐던 것과 대비되는 점이다.

단지 총수의 의중을 충실하게 각 야전부대(계열사)에 전달하는 데서
벗어나 계열사들의 자율적인 경영을 최소한도로, 그러나 실무적인
사업감각을 갖고 지원하는 쪽으로 큰 "그림"이 바뀌지 않겠느냐는
전망을 낳고 있다.

다른 그룹의 신임 기조실장들에서도 이런 특징이 공통적으로 감지된다.

코오롱 동양 두산 진로 미원 등의 기조실장 교체는 한결 "공격적
색채"가 더 짙다는 분석도 있다.

코오롱의 송대평신임 기조실장은 입사이래 주로 신규사업 개척을
맡아온 실물통이다.

지난 83년 그룹 비서실(당시)산하에 발족된 제2신규사업팀장을 맡아
정보통신사업 진출에 디딤돌을 놓았고, 상사에서는 개발사업본부장으로
대북한 신용장 개설을 처음 성사시키기도 했다.

동양의 박중진신임 종합조정실장은 89년 그룹에 몸을 담은 뒤
<>아멕스카드인수 <>동양글로벌(무역상사) 설립 <>토탈 키친 인수 등의
산파역을 맡은 경우다.

두산의 박용만기조실장은 박용곤그룹회장의 동생으로 맥주 토건 음료
등 주력 계열사를 두루 거친 "실세 기획통"이다.

진로의 이희정기조실장과 미원의 류영학회장실 사장,
아남의 황인길기조실장은 각각 주력계열사의 사장에서 자리를 옮겨 왔거나
기존 사장직을 겸직하게 된 케이스로 야전냄새가 물씬 배어있는 인물들이다.

한마디로 각 그룹의 기조실장 교체는 최근 재계에 큰 흐름으로
나타나고 있는 <>전문 경영인에 의한 자율 경영 체제 구축 <>소그룹으로의
분할 경영 <>오너(총수) 세대교체 등과 맞물린 움직임이 아니겠느냐는
분석을 낳기에 충분하다.

창업 원로세대가 그룹경영을 집중 관리하던 "선단식 경영"체제에서
자율 전문화 분할 등을 키워드로 하는 탈선단 경영으로의 변신을
가속화하는 신호탄으로 여기는 시각도 있다.

재계가 더욱 주목하는 것은 이제부터 연말까지 본격화될 대기업
그룹들의 인사 내용이다.

기조실장을 바꾸는 그룹들이 몇군데만 더 생겨도 재계의 이같은
분석은 한결 "힘"을 싣게 될 게 분명하다.

그럴 가능성이 현재로서는 커보인다.

30대 대기업그룹 대부분이 노태우전대통령의 비자금에 연루돼 사법처리를
기다리고 있는 판이다.

또 총수의 "측근 그림자"로 기능해왔던 상당수 그룹의 기조실장들
자체도 비자금에 직접 개입돼 있어 일부는 총수의 대타로, 일부는 병행해서
사법처리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비자금이라는 외부 변수에 의해서도 기조실장 교체는 하나의 대세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또 비자금 여파로 오너회장들의 친정에 관한 운신폭도 좁아질 수 밖에
없게 됐다.

그 여파는 기조실의 위상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

이래저래 재계에 "기조실장 바꾸기"를 키워드로 한 경영체질 수술작업이
본격화될 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학영기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