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인은 우선 보옥을 방안으로 들이고 구들 위 방석에 앉도록 하였다.

보옥이 방석에 앉자 습인은 자기가 쓰던 발화로를 가져와 보옥의
발밑에 놓아두었다.

차가운 날씨에 얼었던 보옥의 발이 그 발화로의 온기로 스르르 녹는
기분이었다.

그 다음 습인은 허리에서 염낭을 끌러 매화처럼 생긴 향쪽을 두
개 꺼내었다.

보옥이 습인이 무엇을 하려고 저러나 하고 쳐다보니, 습인은 그 향쪽
에다 불을 붙이더니 자기의 손화로 뚜껑을 열고 불붙은 향쪽을 넣고는
다시 뚜껑을 닫았다.

아, 발화로를 나에게 주고 나니 추워서 자기는 손화로로 따뜻하게
하려고 저러는구나.

보옥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습인은 그 손화로마저 보옥의 품에 안겨
주었다.

자그마한 손화로가 품에 안기자 보옥의 손과 가슴이 금방 따뜻해졌다.

그런 습인에게서 보옥은 보통 시녀들과는 다른 섬세하고 포근한 정을
느낄 수 있었다.

보옥의 몸이 온기로 데워지자 이번에는 습인이 뜨거운 차를 찻잔에
담아 왔다.

보옥이 그 차를 호호 불어가며 마시는 동안 습인의 어머니와 오빠가
과일상을 푸짐하게 한 상 차려 가지고 왔다.

그러나 보옥의 식성을 잘 아는 습인이 볼때 보옥이 집어먹을 만한
것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잣 같은 것이나 조금 집어먹을까.

습인은 잣을 한 줌 집어 껍질과 보늬를 까서 그 부스러기들을 입으로
불어 날리고는 말간 잣 알맹이들만 골라 손수건에 얹어 보옥에게 건네었다.

보옥이 그 잣들을 집어먹으며 습인의 얼굴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눈자위가 불그레 물들어 있고 분을 바른 볼에는 눈물이 흘러내린 자국이
있었다.

보옥은 습인이 오늘 아침 부랴부랴 자기 집으로 간 일과 그 눈물자국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울었어? 무슨 고민이 있나?"

보옥이 소리를 죽여 습인에게 넌지시 물었다.

"울긴요. 눈에 티가 들어가 좀 비볐더니만"

습인은 얼른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보옥은 더 캐어묻고 싶었으나 집안 식구들이 옆에 있어서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였다.

그렇게 습인의 집에 와서 습인을 만나보고 또 대접도 받고 나서 보옥과
명연은 다시 가진 대감댁으로 향했다.

보옥은 습인의 오빠 화자방이 준비해온 가마를 타고 갔고, 명연과
화자방은 말을 끌고 가마를 뒤따랐다.

습인의 집으로 올 때는 말을 타고 온 보옥이었지만 돌아갈 때는 누가
볼까 싶어 가마를 탄 것이었다.

시녀인 습인의 집에 영국부 도련님이 몰래 놀러왔다가 가는 것을
어른들이 보게 되면 혼이 날 것이 뻔하였다.

가진 대감댁이 가까워오자 보옥은 가마에서 내려 말로 바꿔 탔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