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박물관의 난맥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국립중앙박물관의 역사는 1908년 출범한 창경궁내의 이왕자박물관에서
비롯된다.
일제기의 경복궁내 총독부박물관을 거쳐 광복후에는 국립박물관으로 개편
된다.
6.25전쟁을 겪으면서 경북궁->부산->남산->덕수궁으로 옮겨 다니게 된다.
그뒤 72년에는 경북궁내에 현대식 설비를 갖춘 건물을 신축하여 이전
하면서 명칭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고쳐진다.
86년에는 구중앙청사(일제때 총독부건물)로 옮겨졌고 그 청사가 일제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헐리게 되어 앞으로 두번을 이전해야 할 판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87년이 넘는 역사에서 가장 큰 수난을 당한 것은 6.25
전쟁때다.
유물을 보관했던 경복궁전각 일부가 폭격을 받아 수천점이 소실되었던
것이다.
그때 광복직후 일제초부터 인수한 유물들의 이름이 기록된 박물관 목록도
없어진 것으로 망실카드에 올려져 있었다.
그런데 최근 국사편찬위원회의 "전국고지도군사목록"간행사업에 참여한
전문학자들이 박물관지하수장고에서 그때의 "박물관목록"을 찾아 내면서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판목1조(11매)"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
대동여지도는 김정호가 조선조의 지도와 지지를 집대성한 것으로 그의
혼자 힘으로 목판에 판각을 하여 1861년(철종 12) 22첩을 찍어냈다.
그동안 대동여지도의 판목은 60여장 안팎인 것으로 추정되어 왔으나
숭실대박물관에 소장된 만복1매가 유일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이번에 11매를
더 찾아낸 것은 쾌거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곧 6.25이후 40여년동안이나 수많은 귀중문화재가 박물관 지하수
장고에 냉동이쳐져 왔고 그동안 몇차례의 박물관 이전때에도 유물이나
자료들을 기계적으로 옮겨놓았을뿐 목적과 실물을 뒤로하고 작업을 해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단적인 증거다.
그로 미루어 국립중앙박물관의 수장품숫자(12만4,000여점)도 서구에
지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그처럼 난맥상태에 빠진 근본적인 원인은 예산의 부족과
그에 따른 전문인력의 태부족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유물의 구입 보존 처리에서 문화재의 발굴과 자료의 조사에 이르는 모든
연구업무를 관장하는 학예직 31명으로는 그 방대한 수장물을 제대로 관리
하기란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정부는 이번 일을 박물관에 예산을 획기적으로 증액해주고 전기로 삼았으면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13일자).
비롯된다.
일제기의 경복궁내 총독부박물관을 거쳐 광복후에는 국립박물관으로 개편
된다.
6.25전쟁을 겪으면서 경북궁->부산->남산->덕수궁으로 옮겨 다니게 된다.
그뒤 72년에는 경북궁내에 현대식 설비를 갖춘 건물을 신축하여 이전
하면서 명칭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고쳐진다.
86년에는 구중앙청사(일제때 총독부건물)로 옮겨졌고 그 청사가 일제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헐리게 되어 앞으로 두번을 이전해야 할 판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87년이 넘는 역사에서 가장 큰 수난을 당한 것은 6.25
전쟁때다.
유물을 보관했던 경복궁전각 일부가 폭격을 받아 수천점이 소실되었던
것이다.
그때 광복직후 일제초부터 인수한 유물들의 이름이 기록된 박물관 목록도
없어진 것으로 망실카드에 올려져 있었다.
그런데 최근 국사편찬위원회의 "전국고지도군사목록"간행사업에 참여한
전문학자들이 박물관지하수장고에서 그때의 "박물관목록"을 찾아 내면서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판목1조(11매)"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
대동여지도는 김정호가 조선조의 지도와 지지를 집대성한 것으로 그의
혼자 힘으로 목판에 판각을 하여 1861년(철종 12) 22첩을 찍어냈다.
그동안 대동여지도의 판목은 60여장 안팎인 것으로 추정되어 왔으나
숭실대박물관에 소장된 만복1매가 유일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이번에 11매를
더 찾아낸 것은 쾌거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곧 6.25이후 40여년동안이나 수많은 귀중문화재가 박물관 지하수
장고에 냉동이쳐져 왔고 그동안 몇차례의 박물관 이전때에도 유물이나
자료들을 기계적으로 옮겨놓았을뿐 목적과 실물을 뒤로하고 작업을 해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단적인 증거다.
그로 미루어 국립중앙박물관의 수장품숫자(12만4,000여점)도 서구에
지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그처럼 난맥상태에 빠진 근본적인 원인은 예산의 부족과
그에 따른 전문인력의 태부족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유물의 구입 보존 처리에서 문화재의 발굴과 자료의 조사에 이르는 모든
연구업무를 관장하는 학예직 31명으로는 그 방대한 수장물을 제대로 관리
하기란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정부는 이번 일을 박물관에 예산을 획기적으로 증액해주고 전기로 삼았으면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