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옥이 그렇게 한숨을 쉬고 나서 밤을 다시 집어들어 까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습인이 가민히 한숨을 쉬는 것이 아닌가.

"왜?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아까 보니 얼굴에 눈물자국이 있던데"

보옥이 염려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제가 도련님 댁에 와있는 몇해 동안 그 외사촌 동생을 볼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이제 제가 집으로 돌아가게 되니까 그애가 시집을 간다고 하는
군요"

보옥이 놀라서 밤을 저쪽으로 훌쩍 던지기까지 하였다.

"오늘 집에 간것도 그 일을 의논하려고 간 거예요.

어머니랑 오빠가 그러는데 조금만 더 기다리면 제 몸값을 장만해가지고
와서 저를 도로 찾아갈 거래요"

"무엇때문에 너를 데리고 가려는 거지?"

보옥이 던져버린 밤을 다시 집었다 또 놓고 하며 어쩔줄을 몰랐다.

"무엇 때문이라니요? 제가 태어났던 집으로 돌아가는 건데 이유가
따로 있을리 있나요?

제가 도련님 댁에서 낳아 기른 종년도 아닌데 여기서 평생을 보낼 수는
없잖아요"

습인이 고개를 약간 들고 보옥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어쨌든 넌 못가. 내가 보내지 않을 거야"

보옥은 자기도 모르게 버럭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도련님이 보내지 않겠다고 해도 별수 없어요.

궁중에도 법도가 있어 사람을 기한없이 무조건 눌러 있게하는 법은
없거든요.

물론 평생을 궁중에서 보내도록 정해져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말이에요.

저는 몸값을 받고 이집에 왔으니 몸값만 마련되면 얼마든지 나갈수
있지요"

"할머니도 너를 보내려고 하지 않을 거야"

이번에는 보옥이 할머니를 끌어오기까지 했다.

"대부인님이 저같은 것을 왜 붙들고 내보내지 않는단 말이에요?

제가 아주 영특한 여자라서 대부인님의 마음에 꼭 든다면 모를까,
저같이 별볼일 없는 여자들은 몸값만 들어모년 얼른 내보내시려 할
거예요.

저보다 나은 여자들이 이 집에 좀 많아야지요"

보옥이 조리있게 대꾸하는 습인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푹 떨군채 잠시
침묵하다가 작은 목소리로 한마디 뱉었다.

"그래 기어코 나가겠다는 말이지?"

"예, 그래요. 나가기로 했어요"

보옥이 울먹이는 얼굴로 와락 손을 뻗어 습인의 손을 꼭 잡았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