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대통령 비자금 파문으로 거의 두달여에 걸쳐 재계에 불어닥쳤던
거센 회오리바람이 대기업총수들의 불구속기소로 일단은 비껴간 것으로
판단된다.

전직 대통령 구속이라는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는 이제 대기업에 일대 전환
을 불가피하게 하고 있다.

이번 사건의 핵심인 비자금 제공당사자가 바로 대기업들이라는 점에서,
또 이들 대기업이 이 비극적인 사태를 잉태시킨 정경유착의 한 파트너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 때문에 정부가 구상하는 대기업정책은 당연히 정경유착을 근절할 수
있는 대기업체질의 근본적인 개선쪽으로 모아지고 있는것 같다.

비자금이란 입장에 따라 통치자금 성금 뇌물등 다양한 용어로 둔갑해서
불리는 특수한 자금이다.

그러나 그 본질은 정경유착을 위해 만들어진 비정상적 자금이다.

정부가 경제발전방향을 제시하고 더불어 조세와 금융등 온갖 정책수단을
다 장악하고 있던 상황에서 정치권력에 순응하는 것은 기업의 생존전략
이었다.

정부가 갖가지 혜택을 주면서 육성하는 사업에 참여하지 못하면 그것은
바로 재계의 반열에서 탈락하는 것을 의미했다.

또 "괘씸죄"에라도 걸리면 자금줄이 막혀 잘 진행되던 기존 사업까지도
위태로울 수 있었다.

따라서 기업들이 정부가 보호해주는 육성사업에 진출하고 값싼 내.외자를
조달받으려면 정치자금을 반강제적으로 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대기업 스스로 율곡사업 원자력발전사업등 대규모
특혜성 사업을 따내기 위해 로비활동을 벌이거나 사업자선정에 대한
인사치레 명목으로 비자금을 적극적으로 상납한 경우도 있었다.

이같은 행위는 사회전체의 비용을 엄청나게 증가시키는 것이다.

기업이 비자금을 조성한다면 최종적으로 그 비용은 소비자에게 전가되게
마련이다.

정치인은 정치자금을 조달받자면 무언가 반대급부를 주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조달된 돈은 그 운용도 비정상적일 수밖에 없고 그
결과 지하경제를 번창시킨다.

비자금의 성격이 뇌물이든 상납이든 결국 규제를 회피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그러한 규제를 완화하면 정경유착 가능성은 훨씬 줄어들 것이다.

대기업문제는 모든 것이 한국대기업특유의 소유.지배형태에서 출발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총수에게 지나치게 편중된 대기업의 소유구조는 결국 오너의 경영전권
전횡체제를 가능하게 하고 있다.

수백억원대의 비자금을 불법적으로 조성하고 또 이를 마음대로 유출해
정경유착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외국 대기업과는 판이한 이러한
총수1인 지배체제 때문이었다.

당초 대통령 자문기구인 세계화추진위원회에서 시작된 대기업 지배구조
연구가 비자금사건이 터지면서 경제부처에서 강도 높은 대기업정책준비로
바뀌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11월말 홍재형부총리는 "정부는 별도의 재벌정책 추진을 당분간
유보하되 기업 스스로의 개선노력을 적극 유도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부와 여당은 최근까지도 세계화시대를 맞아 규제완화등을 더욱
과감히 실시하여 자유로운 기업활동은 최대한 보장하는 "당근"정책과, 정경
유착의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독단적이고 탈법적인 경영형태를 일삼는
기업을 단죄하는 "채찍"정책을 골자로 하는 "신기업정책"수립에 부산한
모습을 보였다.

이번 비자금사건에 거의 모든 상위 대기업들이 연루됨으로써 적어도 일시적
으로는 한국경제가 타격을 입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정경유착과 같은 구조적인 문제점이 시정되고
각종 규제가 완화될 경우 궁극적으로 한국경제의 체질이 보다 강화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정경유착이 정부의 지나친 규제에서 비롯된 만큼 이번 사건이 정경
유착의 구조를 개혁하여 생산성 향상에 기여할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번 충격을 잘만 극복한다면 정계와 재계의 오랜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순수한 민간의 힘으로 경제를 이끌어갈 수 있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번 비자금 파동이 제대로 마무리 되는 것이 재계입장에서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현재 선진국의 보호무역주의 시장개방 세계화의 진전 등은 우리 기업으로
하여금 경쟁력강화에만 신경쓰도록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정부와 기업도 이전의 관계를 재정립하지 않으면 안된다.

기업의 규모가 커지고 권위주의가 점차 사라지면서 정부와 대기업의 관계도
수직적 관계에서 수평적 관계로 변화될 것이다.

이를 가속화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대기업내부적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총수의 독단적인 행동과 전횡을 견제할 새로운 도구가 필요하다.

전문경영인의 권한을 강화해 총수의 무분별한 투자행위를 경계토록 한다.

또 소액주주들이 집단으로 대주주의 무모한 투자를 견제할 수 있는 법률적
장치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또 노조가 경영층을 견제하고 대기업총수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사외
이사제를 도입하여 상임이사들을 감시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선진국형 대기업정책이다.

정부의 역할은 불공정하거나 경쟁제한적인 행위에 대해서만 규제하는 공정
거래 감시자에 국한되는 추세이다.

특히 특혜성 국책사업시행자 선정시에는 완전한 공개경쟁이 이루어지도록
한다.

그러므로 정경유착의 근절을 위한 규제완화와 독점금지형 공정경쟁 정책이
향후 대기업정책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이와 더불어 대기업들 스스로도 경영혁신을 촉진하기 위해 음성적인
비자금조성및 제공 근절, 공정하고 깨끗한 기업경영과 신뢰받는 기업인상
구축등에 주력해야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