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인도제도 자메이카의 하노버시에 있는 몬테고베이의 트라이얼골프
코스는 본래 US LPGA투어 오프닝대회인 자메이카클래식의 본고장이다.

1957년 랄프 플루머에 의해 디자인된 이 골프장은 약6,500야드의
길이로 비교적 짧은 코스이다.

그러나 카리브해 특유의 바람이 늘 불어대기 때문에 그곳에서의 골프는
"바람과의 전쟁"으로 비교된다고 한다.

그런데 트라이얼코스의 17번홀은 530야드로 파5홀이고 18번홀은
434야드의 파4홀이다.

그래서 비교적 쉬운 홀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트라이얼의 17,18번홀은 지난 월요일 아침에 끝난 금년도
월드챔피언십의 향방이 갈라진 홀이었다.

대회 마지막날 이 5언더파로 선두를 달리던 로렌 로버츠의 17번홀
티샷은 약간 훅이 걸려 페어웨이왼쪽 러프로 들어갔다.

세컨드샷한 볼은 다시 그린우측 워터해저드부근 러프에 멈추었다.

워터해저드에 빠질것 같던 볼이 러프에 멈출때까지만 해도 승리의
여신은 로버츠의 편에 선것처럼 느껴졌었다.

그러나 그의 서드샷이 그린을 오버하는것을 보고는 로버츠의 우승에
대해서 고개를 갸우뚱거리지 않을수 없었다.

우승을 노리는 로버츠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아쉬운 17번홀에서의
파였다.

로버츠도 그렇게 느끼는듯 그의 얼굴표정은 영화 25시의 끝장면에서
펼쳐 보이던 앤터니 퀸의 절묘한 연기로도 도저히 나타낼수 없을만큼
복잡미묘한 것이었다.

그의 뒤로는 마지막조인 4언더파의 비제이 싱과 2언더파인프레드
커플스가 쫓아 오고 있었다.

17번홀에서 두 사람의 티샷은 나무랄데 없었다.

커플스가 투온한 볼은 그린을 오버한 반면, 싱의 볼은 홀컵에서 훨씬
가깝게 붙었다.

그래서 55만달러의 우승상금은 싱의 차지같아 보였다.

그런데 커플스의 이글퍼팅이 들어가고 이글퍼팅을 노린 싱의 볼이
컵 바로 앞에서 멈추는 순간 기적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비록 싱이 17번홀에서 버디를 함으로써 공동선두에 올라 서기는
하였으나 오히려 두 홀을 남겨 놓고 3타나 뒤져 있던 커플스가 17번홀에서
이글을 낚아챔으로써 여전히 한타 뒤져 있기는 하지만 그가 우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18번홀에 이르러 10여m 거리에서 홀컵을 향하여 주춤주춤
굴러가던 커플스의 버디퍼팅한 볼이 멈출듯 멈출듯 하면서도 멈추지
않은채 끝내는 홀컵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커플스가 오른팔을 불끈 쥐어들어 환호할 때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필자는 신이 우리에게 기적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연장 두번째 홀에서 커플스의 우승이 결정되는 것을
지켜 보고 있을때 승리의 여신은 필자로 하여금 서정주선생의 "국화
옆에서"의 싯귀를 읊조리게 하였다.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 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었나 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