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인을 그렇게 자리에 눕혀주고 보옥은 대부인의 방으로 가서 저녁밥을
먹고는 다시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자기 방과 붙어 있는 바깥방들의 동정을 둘러보니 가장 가까운 방에
누워 있는 습인은 이미 잠이 든 듯했고 다른 한 방에서는 등불 밑에서
사월이 혼자 골패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다른 시녀들은 어디 갔나 싶어 보옥이 그 방으로 들어서며 사월에게
물어보았다.

"청문, 기하, 추문, 벽흔 이들은 다 어디로 간 거야?"

"원앙이랑 호박 이들에게 놀러 갔어요.

아직도 설날 기분들 내나 봐요"

사월이 골패를 모아 정리하며 시무룩한 얼굴로 대답했다.

"넌 왜 놀러가지 않았니?"

"다 놀러가버리면 어떡해요? 도련님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을 때이고,
습인은 아파서 저렇게 누워 있고, 방마다 등불과 화로불이 있는데
무슨 일이 생기면 큰일이잖아요.

그래 나 혼자 지키고 있을 테니까 다들 놀고 오라고 그랬죠"

보옥은 여기에도 습인처럼 충성스런 시녀가 있구나 하며 속으로 감탄
하였다.

"내가 대신 지키고 있을 테니까 너도 놀고 싶으면 가서 놀아. 골패를
만지작거리는 걸 보니 너도 놀고 싶은 게 분명해"

그러나 사월은 일어나 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엉뚱한 소리를
하였다.

"도련님이 여기 계시겠다면 나도 나가 놀 필요가 없는 걸요.

둘이서 얼마든지 재미있게 놀 수 있잖아요?"

"둘이서 재미있게?"

보옥이 처음에는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다가 다음 순간에는
장난기 어린 얼굴로 변했다.

"그래요. 도련님은 노는 데는 타고난 분이잖아요"

보옥이 은근히 기분이 좋아져서 어디 놀이기구가 없나 하고 방을
둘러보았다.

마침 저 구석에 놓여 있는 경대가 눈에 띄었다.

"참, 아침에 들으니 사월이 너 청문이에게 머리가 가렵다고 그러더군.

청문이 보고 머리를 좀 빗어달라고 하니까 청문이가 너에게 핀잔을 주고
그랬지.

청문이랑 사이가 안 좋은 모양이지. 지금 내가 네 머리를 빗어줄게"

"정말요? 아이 좋아"

사월이 뛸 듯이 기뻐하며 경대를 가지고 와서 그 앞에 앉더니 비녀를
빼고 머리를 풀었다.

보옥이 한손에는 빗을 들고 다른 한손으로는 치렁한 사월의 머리카락을
매만져가며 빗질을 해나갔다.

보옥이 그렇게 머리카락을 매만질 적마다 사월은 상체를 약간 비틀며
가늘게 신음소리를 내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