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서울의 크리스마스는 눈이 내리지는 않았으나 강습한 추위로
인하여 인상에 남는 하루였다.

샌드위치로 30야드의 샷을 몇 번 연습하는 사이 금방 오른손의
다섯손가락이 쑤시는듯 아려올 정도의 강한 추위였다.

그래서 그런날 필드에 나가는 골퍼는 물론이요 골프연습장에 나오는
사람도 진짜 골프광이거나 지독히 성실한 사람일 것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런데 필자가 잘 아는 H씨는 그날 아침에도 연습장에 나와 있었다.

H씨는 축협에 근무하는데, 필자가 다니는 골프연습장의 아침멤버로서는
비교적 젊은 연배의 사람이다.

대학 때 역도를 하였다고 하는데,그래서 그런지 그의 어깨쭉지의
근육은 필자의 허벅지만하다.

얼굴이 호남형은 아니지만 붙임성이 있어서 연습장을 찾는 모든
사람들과 친하다.

특히 그는 누군가 연습장에 도착하면,언제 바꿨는지 가지고 있던 동전을
꺼내어 즉각 자판기커 한잔을 뽑아 주며 다정스레 인사하는 사람이다.

그날 아침, 필자가 큰 맘 먹고 자판기 커피가 아닌 원두커피 한 잔을
사면서 듣자하니, H씨는 성당에 다닌지도 오래라고 했다.

그는 성당에 나가기 시작한 이래 두어번 정도만 주일미사에 빠졌다고
했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미사에 빠지지 않았고, 심지어 휴가철에 놀러
가서조차 그 인근 성당을 찾아 가서 주일미사를 보았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지난 2년동안 연습장에 결석한 것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에 그치는 H씨의 근성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처럼 성실하고 열심인 H씨이지만 골프실력은 아직도 100을 깨기에도
요원한 모습이다.

그의 스윙도 어드레스를 제외하고는 비기너수준을 크게 웃돌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볼을 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아무도 그가 2년동안
거의 매일 아침 연습장에 나온 사실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말많은 골퍼들의 동네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레슨프로는 물론이요, 그 보다 훨씬 늦게 시작한 골퍼들도
그를 보고는 툭하면 의기양양하게 어떻게 하라고 한 마디씩 던지곤 하기
때문이다.

필자로서도 H씨를 그냥 보아 넘길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를 가르치기에는 역부족이라서 레슨을 하리라고는 엄두를
내지 못한채 살며시 H씨에게 골프를 잘 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정말 잘 하고 싶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골프 잘 하기를 원하느냐는 질문에 골프연습장에 나오는 어느 누가
아무래도 괜찮다고 대답할 사람이 있겠는가?하지만 골프 잘 하고 싶다고
대답하는 H씨의 표정이 어찌나 진지한지 필자의 질문이 결코 우문이
아님을 느끼게 하였다.

그래서 필자가 아는 선생을 꼭 한 번 데려와 보겠노라고 했다.

또한 마음속으로는 어느 초인이라도 나타나서 H씨로 하여금 속시원하게
볼이 날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기를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골프는, 재주만으로도 안되고 성실함만으로도 잘 안되는,
참으로 묘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한결 같이 골프에 빠져드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