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해 미국의회는 가히 혁명기를 맞았다 해도 좋을 정도로 많은 변화를
겪었다.

40년만에 공화당이 민주당을 제치고 의회를 지배하게 된것도 큰 이변
이었지만, 뉴트 깅그리치같은 인물이 혜성처럼 나타나 하원의장이 되면서
의회를 완전히 장악하게 된 것은 더 큰 이변으로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타임지가 올해의 인물로 깅그리치를 선정한 것에 대해 이의를 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이다.

깅그리치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숱한 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공화당 민주당 의원 할 것없이 그를 의회의 명실상부한 지도자로
추켜 세우는데는 주저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대립관계에 있는 적들조차도 "미국과의 계약"이나 다른 정책
대안들이 워싱톤을 변화시키고 있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그는 1940년대와 50년대에 걸쳐 의회를 지배했던 텍사스출신의 민주당출신
샘 레이번 하원의장보다 더 큰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는 평판을 듣고 있기도
하다.

그는 하원의장에 당선되자 먼저 모든 위원회의 위원장을 자기가 직접
지명해 버렸다.

고참 의원들이 하던 관례를 깨고 직접 팔을 걷어붙인 것이다.

깅그리치는 더 나아가 소위원회의 위원장까지도 자신의 몫으로 처리했다.

특히 소위원회의 위원장에는 2명의 초선의원을 앉히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비능륭적인 위원회의 수를 줄이고 의회의 사무직인원도 대폭 삭감해
버렸다.

하원 법사위원장인 헨리 하이드씨는 "깅그리치는 더할 나위없는 의회의
지도자"라며 "그는 우리들의 혁명을 책임지는 사람"이라고 까지 말하고
있다.

미기업연구소의 노만 온스테인박사는 "깅그리치는 영국의회의 하원의장
보다 힘이 더 있고, 의회에서 선출한 수상처럼 막강하다"고 인물평을 한다.

깅그리치가 주도하는 미의회는 많은 기록을 남겼다.

새로운 의회가 개원된 지난 11개월 동안 의원들은 3천90시간의 회의시간을
가졌다.

이중 하원이 1천4백1시간, 상원이 1천6백89시간이었다.

날수로는 3백40일(하원 1백54일, 상원 1백86일)이었다.

숫자상으로 보면 미국의회는 거의 매일 의사당 문을 활짝 열어 놓고
국가안위와 민생문제를 논의한 셈이다.

따라서 활동이 두드러진건 당연하다.

14년만에 가장 활발한 의회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도 그 까닭이다.

그중 큰 소득이라면 깅그리치가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던 "미국과의 계약"
10개 사항중, 9개를 당초 약속대로 회기 1백일 이내에 통과시킨 점이다.

의원임기 수를 제한하는 것만이 부결됐을 뿐이다.

그러나 불만스런 구석도 없진 않다.

수백건의 법률을 심의했지만 실제 발효된 법은 60개에 불과, 미 의회가
개원하는 회기 첫해의 최저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는 상원과 하원, 의회와 대통령간의 불화때문이었다.

그만큼 갈등이 많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물론 그 갈등의 중심에는 항상 깅그리치가 서 있다.

그의 등장이후, 공화당과 민주당간에 가장 첨예하게 대립돼 있는 것은
균형예산 문제이다.

사회복지법안과 교육융자 프로그램등은 다 이 균형예산과 관련된 것들이다.

특히 사회복지법안중 노년층을 위한 메디케어, 빈곤층을 위한 메디 케이드
는 연일 신문과 방송의 머릿기사를 장식하고 있다.

워싱턴의 1백만 흑인집회, 뉴욕 등 대도시에서의 끊임없는 항의 데모는
모두 사회복지법과 관련된 것들이다.

최근들어 깅그리치는 초기의 과격한 발언들을 자제하면서 자신의 몸을
낮추고 있다.

민주당이 자신의 윤리문제를 물고 늘어지는데다 정당간의 모든 쟁점을
깅그리치에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1995년 미국의 매스콤에 가장 많은 등장한 이름인 뉴트 깅그리치.

깅그리치 주도하의 미의회가 앞으로 40년만의 혁명을 어떻게 마무리해
나가고 혁명에 뒤따르는 소음과 비판은 어떤 방식으로 수용해 나갈지
두고볼 일이다.

또 클린턴행정부와의 조화를 이뤄 나가는 테크닉도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