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금융산업은 과거 투자재원이 부족하였던 경제개발 초기단계에서는
주로 내자의 효과적인 동원과 산업자금의 저렴한 공급을 통해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후 우리나라 금융산업은 많은 금융기관이 신설되고 새로운 금융상품이
활발히 도입되면서 외형적으로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질적-기능적인 면에서는 아직까지 발전이 미흡하여 실물경제나
다른 나라의 금융산업에 비해 크게 뒤떨어져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자유시장경제 체제하에서 금융부문과 실물부문은 수레의 두 바퀴처럼
상호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어느 한쪽이 기울어진 상태에서는 결코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또한 최근 선진국에서는 금융산업이 고도의 정보-지식 집약적 산업으로
변모하면서 국민경제 전체에서 차지하는 부가가치 비중이 증가하고 있어
하나의 산업으로서 금융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이처럼 금융산업 발전의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지만
금융의 선진화는 기본적으로 "규제와 보호"라는 종래의 패러다임에 의해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과제이다.

최근 우리 금융을 둘러싸고 있는 내외여건은 하루가 다르게 급속히 변화
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 금융시장에서는 금융 외환및 자본거래에 대한 규제가 크게
완화되는 가운데 다국적 기업경영과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등을 배경으로 각국
금융시장이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는 이른바 금융의 범세계화(financial
globalization)가 빠른 진전을 보이고 있다.

파생금융상품 거래및 재정거래가 확대되는 한편 새로운 수익원을 찾아 이종
금융기관의 업무영역으로 상호진출해 나가는 소위 금융의 겸업화
(universalization)도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합병-매수에 의한
대형화와 함께 중소 금융기관의 전문화 경향도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이와같은 세계금융의 조류는 최근들어 선진국의 시장개방압력과 자국
금융산업의 효율제고 필요성 등을 배경으로 개발도상국에까지 급속히 파급
되어 왔으며 우리나라도 80년대 이후 금융의 자유화-국제화를 꾸준히 추진
하여 왔다.

그동안 정부와 한국은행은 요구불예금을 제외한 모든 금리의 자유화를
앞당겨 완료하고 금융기관 내부경영에 대한 규제를 대폭 축소 정비하여
왔을 뿐 아니라 금융기관간 업무영역에 대한 규제도 완화해 오고 있다.

또한 금융시장개방도 정부가 이미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개방계획을
밝힌데다 WTO체제가 출범하고 우리나라의 OECD 가입도 멀지않아 실현될
것으로 보여 앞으로 더욱 빠른 속도로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따라 그간 규제와 보호의 틀속에서 안주해온 국내 금융기관들은 이제
국내외를 막론한 치열한 경쟁시대를 한꺼번에 맞이하게 되었으며 앞으로는
최소한의 규제속에서 경영의 자율성을 보장받는 대신 그 결과에 대해서는
자신이 전적으로 책임지는 적자생존의 게임 룰을 엄격하게 적용받게 될
것이다.

아울러 금융의 자유화-국제화는 금리 환율등 가격변수와 금융기관의 자산
부채의 변동을 증폭시킴으로써 금융기관 경영과 관련한 각종 리스크를 크게
증대시키게 될것이다.

이처럼 경쟁의 격화와 리스크 증대로 귀결되는 작금의 금융환경 변화는 곧
우리 금융도 이제 선진화를 통해 세계일류를 추구하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려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 금융의 현황 그러나 이와 같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수 있는 우리
금융산업의 주체적 역량은 아직도 상당히 취약한 실정이다.

과거 우리의 금융산업은 성장금융체제가 장기간 지속되는 과정에서 기업성
이 크게 약화됨으로써 자생적 발전을 제약받아 왔다.

무엇보다도 금융의 본질적 기능이라 할수 있는 사전적 여신심사및 사후적
채권관리 기능이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고 있으며 자산운용은 대부분 담보
대출 위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유망한 중소기업이라 하더라도 담보가 없으면 대출을 받지
못하는 등 금융자금 배분의 효율성이 매우 낮은 상태이다.

또한 상당수의 은행이 적지 않은 부실채권을 안고 있는 가운데 오랫동안
주인없는 경영체제로 운영되어온 결과 경영규모나 효율은 물론 금융기법
등의 측면에서 경쟁력이 매우 취약한 상태이다.

더욱이 이같은 금융기관의 비효율성은 자금중개비용의 상승으로 이어져
고금리의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그동안 금리, 자금조달 및 운용 등에 관한 규제가 은행권과
제2금융권간에 차별적으로 이루어진 결과 은행권의 영업기반이 약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은행권만을 대상으로 하는 통화신용정책의 유효성을 제약하였고
또한 금융자금의 효율적 배분도 어렵게 되었다.

우리 금융이 이와 같은 취약성과 외부로부터의 도전을 극복하고 선진금융
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개발금융체제의 잔재를 하루빨리 청산하고
금융부문에서도 시장원리가 원활히 작동할수 있도록 제도적 기반을 갖춰
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하겠다.

왜냐하면 앞서 지적한 우리금융의 문제점 대부분은 그동안 금융이 금융
원리에 의해 운용되지 못했던데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책당국은 앞으로 이미 완료된 금리자유화를 실질적으로 정착
시키고 금융기관 내부경영에 대한 잔존 규제를 과감히 철폐하는 한편 정책
금융을 축소 정비하는 등 금융자유화를 적극적이고도 효과적으로 추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세계적인 겸업화추세를 우리 실정에 맞게 수용하면서 금융기관간
경쟁을 촉진할수 있도록 은행-증권-보험의 3원화 체제를 유지하는 범위내
에서 금융기관의 업무영역도 점차 확대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금융기관 스스로의 판단아래 증자 합병 업무제휴 등을 통한 대형화
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개별 금융기관의 특성에 따라 전문화가 촉진될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 나가야 할 것이다.

한편 금융자유화의 진전 및 경쟁격화 과정에서 파생되는 각종 리스크 증대
가 개별 금융기관의 부실화, 나아가 전체 금융시스템의 불안정을 유발하는
일이 없도록 부실 징후에 대한 조기경보체제를 마련하는등 사전적-예방적
감독기능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감독기능이 공평하고 명료한 기준에 의해 행사되도록 금융감독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제고해 나가야 함은 물론이다.

이와 함께 금융기관의 리스크 관리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질수 있도록
선물환시장을 적극 육성하고 금융 선물거래제도를 서둘러 도입하는 등 관련
시장의 정비 확충에도 힘써야 할 것이다.

위와 같은 정책당국의 노력에 상응하여 금융기관도 과감한 자기혁신을
통해 새로운 경영방식과 전략을 마련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시급한 과제는 인사-조직면에서의 리스트럭처링을
통해 종래의 수직적-중앙집권적 조직체계를 전문성과 시장성을 중시하는
수평적 권한분산형 조직형태로 전환하는 한편 과잉인력의 해소및 적재적소
배치로 인력의 효율적 활용을 도모하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외형확대에 치중해온 종래의 경영관행에서 탈피하여 수익성과 효율성
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경영방식을 전환해야 할 것이다.

금융의 자유화-국제화가 진전된 무한경쟁 상황에서 외국 금융기관들과
경쟁하려면 규모의 확대보다는 경영의 내실을 다지는 것이 급선무라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금융기법의 선진화에도 힘써야 할 것이다.

특히 각종 리스크로부터 자산가치를 보호하고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종합적인 자산-부채관리 시스템을 조속히 구축하는 한편 대출심사기법개발
등을 통해 금융의 핵심기능이라 할수 있는 여신 심사기능을 강화하는 것이
매우 긴요하다.

여신기능의 강화는 부실채권을 줄이고 금융기관의 수익성을 높이는데
필수불가결할 뿐 아니라 금융기관이 보다 적극적으로 유망 중소기업을
발굴하여 지원할수 있는 바탕이 된다 하겠으며 이는 근래 우리경제의 최대
당면과제가 되고 있는 중소기업문제를 해결하는데에도 크게 기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직까지 우리 기업의 해외영업을 지원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국제 금융업무의 운영체계를 보강하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세계경제의 다극화 현상에 대응하여 해외진출지역을 다변화하고 업무범위도
국제금융시장에서의 딜링업무 국제리스 정보서비스업무 등 부가가치가 높은
분야로 확대해 나가는 한편 업무기반의 현지토착화를 도모하는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나라 금융산업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은 유능한 인재, 즉
전문 금융인을 확보하는 일이다.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국제금융업무는 물론이거니와 대출심사, 새로운
금융상품의 개발및 리스크관리업무 등의 분야에서 선진 금융기관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전문지식과 경험을 갖춘 전문가를 꾸준히 양성해 나가야
하겠으며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외부 전문가의 초빙도 과감히 시도
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최근 금융산업이 첨단 전자통신기술과 컴퓨터시스템에 의존하는
하이테크 산업으로 빠르게 변모해가고 있는 만큼 전산화-기계화를 위한
투자도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가야 한다.

이는 업무의 효율성과 신속성을 높임과 동시에 고객의 기호에 부합하는
양질의 금융서비스를 개발하기 위해서도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현재 우리의 금융산업은 앞으로도 비효율적인 낙후산업으로 머물 것인지,
아니면 구각을 벗어버리고 금융의 선진화를 위한 기틀을 다져 나갈 것인지의
전환기에 서 있다고 할수 있으며, 이런 관점에서 볼때 금융운용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해야 할 향후 몇년은 매우 중요한 시기라 하지 않을수 없다.

그동안 우리 금융산업은 다방면에 폭넓은 개혁의 성과를 거두어 오긴
하였으나 아직도 개선해야 할 많은 분야가 남아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정책당국과 금융기관 모두가 진취적이고 능동적인 자세로 대내외의
도전에 맞서 나감으로써 금융선진화를 앞당길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한가지 간과할수 없는 것은 금융을 대하는 각 경제
주체의 시각이다.

금융을 실물경제 발전을 위한 하위 개념으로, 그리고 금융기관을 산업자금
공급을 위한 공공기관으로만 인식할 경우 금융산업에 시장원리가 도입되어
자율과 창의가 발휘될 여지는 그만큼 축소될 것이며 이는 결국 경제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정부-기업-가계등 모든 경제주체가 금융에 대한 인식에 있어
금융을 하나의 산업으로 인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금융인 스스로도
과거의 고정관념에서 탈피하여 사고와 의식을 혁신하지 않고서는 금융의
선진화는 지연될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울러 통화당국도 금융시장이 시장원리에 의해 운용될수 있도록 간접규제
방식의 정착여건을 조성하는 한편 은행감독에 있어서도 건전경영을 유도할수
있는 사전적 건전성감독이나 자율감시기능이 활성화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끝으로 금융자유화를 포함한 금융선진화 노력이 성공적으로 추진되려면
기본적으로 거시경제의 안정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인플레하에서의 금융개혁은 과도한 금리상승을 가져올수 있고
이는 결국 환율불안이나 실물경제여건의 악화 등으로 이어져 개혁정책
자체를 위협할수도 있음을 우리는 많은 나라의 경험으로부터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