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한 옛날 원시인들은 일한다는 것을 노는 것으로 라고 지냈다.

수렵생활은 그들의 삶의 보람과 기쁨에 직결됐다.

일한다는 것이 "고달픔"으로 바뀌어 간 것은 일과 놀이의 일치가
깨어지면서 부터였다.

불행하게도 일의 개념과 역사는 힘에 예속된 사람들이 자유나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강요에 못이겨 할 수 밖에 없는 고통스런 행위로서
시작되게 된다.

"일"의 어원을 캐 올라가 보면 "힘든 노력" "괴로운 짐" 등으로 나타나는
것도 그런데서 연유한다.

기독교의 성경에는 제일먼저 일을 한 장본인이 "하나님"이라고 적혀있다.

6일만에 천지만물을 창조한 뒤 하루를 쉰 것으로 되어 있으니 말이다.

그뒤 인간이 신의 명령을 거역한 죄로 "땅이 저주를 받아 수고스럽게
일을 해야 땅이 열매를 맺을 것이라"하여 인간은 일을 해야만 살 수 있는
신세가 됐다.

그것은 신의 축복인 동신에 형벌이요, 의무였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한 마틴 류터는 "세상에서의 소명은 세상에서의 활동과
일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라고 주장해 일과 직업이 신과 인간을 위한 봉사
소명에 의한 활동이라고 새롭게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새는 날아가기 위해 태어났고 인간은 일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말까지 남겼다.

한편 칼빈은 근면 저축 검약한 생활이 구원의 징표라는 교리를 펴,
자본주의의 정신적 토대를 구축했다.

프로테스탄트교리를 바탕으로 산업혁명이후 자본주의적 산업화 과정에서
일과 근면은 무엇보다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잡았다.

"인간의 역사란 일의역사"라는 말이 있듯 일은 그것이 좋든 싫든 인간
본질의 하나처럼 여겨져 온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일하는 인간"(home laborns)이라는 말도 생겼다.

일은 사람에게서 고통을 주고 자유를 빼앗아 가는 동시에 보람과 기쁨을
주는 부정적이고 긍정적인 양가성을 지니고 있다.

이런 일의 본질은 오늘날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요즘 우리는 일의 의미를 너무 경제적 물질적 가치에서만 보는 사고와
습관에 젖어 있다.

먹고 살기위해서만이 아니라 인간의 욕구와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누구나 봉사정신을 가지고 사회의 필요와 목적에
기여한다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우리가 하는 일에따라 사회의 발전방향과 문명의 질이 결정된다고 생각
하면 더욱 그렇다.

정초에 새일을 시작하면서 한번쯤 이런 생각도 해 보았으면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