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옥은 그날 하루 동안 사아의 시중만 받으며 바깥 출입을 일체 삼가
하였다.

온종일 여자들과 어울려 지내야 직성이 풀리는 보옥인지라 방안에만
틀여박혀 있자니 좀이 쑤셔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아침부터 여자들과 어울려 논다고 습인으로부터 핀잔을 듣고
보니 오늘은 영 나가 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우선 습인이랑 사월이 들과 함께 놀면서 그들의 마음부터 풀어놓고
다른 여자들을 찾아갈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보옥은 하품을 해대다가 오랜만에 책을 집어 들고 몇 자 읽어보고는
그것도 던져놓고 이번에는 종이에다 붓으로 그림과 글자들을 되는 대로
그려보기도 하였다.

사아는 보옥이 붓질을 하는 그 옆에서 열심헤 벼루에다 먹을 갈고
있었다.

사아는 보옥이 자기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눈체채고 이번
기회에 보옥의 환심을 사려고 온갖 교태를 다 부렸다.

보옥에게 애교가 가득 담긴 미소와 눈길을 보내기도 하고 먹을 갈면서
슬쩍슬쩍 엉덩이를 흔들어대기도 하였다.

사아는 습인과 보옥의 관계에 대해 시녀들 사에에 떠도는 소문을 알고
있는지라 보옥이 습인과 사이가 나빠진 틈을 타서 습인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보옥은 그런 사아의 교태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 하였다.

아마 기분이 상하지 않은 다른 날 같았으면 사아의 젖가슴을 슬며시
만져보기도 하고 허벅지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보기도 했을 것이었다.

보옥이 저녁밥을 먹은 후 술을 두어 잔 마셨는데, 술이 독했는지 금방
주기가 올라 귓부리가 화끈거렸다.

사아마저 돌려보내고 혼자 등불을 마주 대하고 앉아 있으려니 적적하기
그지 없었다.

보옥은 에라 모르겠다 하며 "남화경"을 집어 들고 아무 데나 펴서 일기
시작했다.

"남화경"은 곧 "장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외편"을 뒤적거리는 중에 "거협편"이 보옥의 눈길을 끌었다.

그 내용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선입견을 깨뜨려야 비로소 진리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 구절들의 표현이 파격적이라 은근히 보옥의 마음을 흥겹게 하였다.

진나라의 유명한 음악가인 고광의 귀를 틀어막고, 역사상 눈이 제일
좋은 사람으로 알려진 이주의 눈을 아교로 발라버리고, 최고로 솜씨좋은
목수인 공수의 손가락을 분질러버려야 비로소 사람들이 귀와 눈이 열려
총명하게 되고 손재간들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식이었다.

"어, 이것 봐라. 재미있는 표현인데. 나도 한번 흉내를 내어볼까"

보옥이 비씩 미소를 지으며 붓을 집어들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