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가곡의 원류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그 원형은 고려의
"정시정곡"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1572년과 1610년에 만들어진 악보가전해지고
있는 것이 고작이어서 추단하기는 어렵고 가곡의 전성기는 영조이후
고종때라고 보는 것이 국악계의 통설이다.

특히 고종때인 1876년에 박효관 안민영이 엮은 "가곡원류"는 우리나라
가곡이 마지막 꽃을 피운것이 이 무렵임을 아려주고 있다.

오늘날과 같은 가곡 한바탕이 이루어진 것도 이때다.

한창 꽃을 피우던 가곡은 1900년대를 전후해 차츰 사향길로 접어든다.

무엇보다 배우기 어려웠기 때문에 전수자가 거의 없었다.

박효관의 제자인 하규일에게서 남창인 이병성 이주환이 가통을 이어
받았을 뿐 여창은 맥이 끊길 위기를 맞았다.

이병성 이주환으로부터 하규일의 맥을 이어 한국 가곡의 명맥을
이어가던 인물이 김월하였다.

"모란은 화중왕이요 향일화는 충신이로다.

연화는 군자요 행화소인이라, 국화는 은일화요 매화한사로다" 남치마에
흰색이나 옥색저고리를 입고 무릎을 세우고 앉아 두 손을 모으고 청아한
목소리로 길게 뽑는다.

몸 전체에 세상만사를 담아 혼으로 부르는 노래다.

청중들은 그의 목소리가 "금사슬을 끄는 소리" "명주실을 풀듯 끊이지
않는 절절한 소리"라고 했다.

가성으로 높은 음을 낼 때는 3음까지 끌어 올려 "젓대소리" 같다거나
머리가 흔들리는 듯한 두성을 낼땐 "귀신소리" 같다는 평도 들었다.

그에게서 시조창을 배운 이완수의 부인 허영숙과 그의 "관산융마"를
듣고 펑펑눈물을 쏟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서울에서 태어나 2살때 어머니를 잃은 그는 남의집 양녀로 들어가
바느질을 배우며 자랐다.

재동보통학교때 한성권번에서 명창 주수봉에게 시조 가사 민요를
배운것이 가곡과의 첫인연이었지만 정작 국악계에 데뷔한 것은 35세때
피난지인 부산에서 이병성의 제자가 되면서부터 였다.

7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예능보유자가 된 그는 남편도
자식도 없는 외로움속에서 40여년을 외로와 할 틈도 없이 후진을
가르치고 뒷바라지하며 살았다.

그리고 바느질삵, 강사료를 억척같이 모은 돈 50억원으로 91년
월하장학재단을 만들어 매년 국악전공대학생 10여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왔다.

지난 1일 78세로 타계한 그가 5일 국악인장을 치르고 영원히 땅속에
묻혔다.

"월하이전 월하없고 월하이후 월하없다"는 신화를 남긴 그의 목소리를
이어갈 인물은 과연 누구일까.

(한국경제신문 1996년 1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