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권이 중소기업용 신용평가표 모델을 새로 개발, 빠르면 다음달부터
시행하게 되리라는 소식은 얼핏 보면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같지만 그
배경을 여러 측면으로 헤집어보면 상당히 깊은 의미를 지닌 움직임으로
평가된다.

때는 바야흐로 중소기업 지원정책과 관련해서 중소기업청 신설과 같은
''특단의 조치''가 발표되는 상황이다.

중소기업청 설치가 중소기업계의 오랜 숙원이었음은 틀림없지만 그보다
훨씬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소망은 역시 자금융통이었다.

자금난을 가장 큰 애로로 꼽아왔고, 그것을 극복할 돌파구의 하나로 은행의
신용대출확대를 갈망해 왔다.

은행권의 이번 조치는 일단 중소기업의 신용대출 확대에 도움이 될 중요한
발거름으로 이해된다.

사업자의 경영능력과 사업성, 노사관계등 비재무 항목의 평가배점을 100점
기준 종전의 27.5점에서 최대 60점까지 높였고 새 평가기준을 토대로 대출해
준 중소기업이 부실화되더라도 담당 직원을 문책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조치가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중소기업경영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금융관행으로 자리잡으려면 몇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우선 은행경영이 그야말로 환골탈태의 변화를 통해 선진화돼야 하고 다음은
기업신용에 대한 기업자신의 올바른 이해와 노력이다.

국내 산업중에서 가장 낙후한 부문은 다름아닌 금융산업이란 지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금융권, 그중에서도 리더격인 은행권은 좀처럼 달라지려 하지
않는다.

시대와 환경변화에 맞춰 스스로 변하려 하기보다 타율적으로 요구될 때에만
마지 못해 따라간다.

관치금융 풍토하의 눈치보기와 만성적 자금 초과수요하의 땅짚고 헤엄치기
식 경영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번에 마련한 새 신용평가표만 해도 그렇다.

늦은 감이 없지 않으며 또 전 은행이 굳이 동일한 기준을 획일적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느냐도 생각해 볼 문제다.

각자의 자산및 고객현황, 그에 입각한 경쟁및 영업전략 차원에서 결정하는
게 더 바람직할 수 있다.

신용대출을 무담보대출과 동의어로 아는 기업의 인식도 바뀌어야 한다.

신용은 실체가 없는 것 같지만 많은 유형-무형의 요인을 배경으로 형성되는
자산이다.

신용을 쌓는 노력은 기업자신의 몫이며 그것을 입증할 정보를 투명하게
제공할 책임도 기업에 있다.

은행이나 제 3의 평가기관은 그것을 각자의 기준과 방법으로 평가해서
활용할 따름이다.

다만 우리 현실은 어느 쪽이나 초보단계를 못벗어나 있다.

그러나 이같은 현실에 대한 해답은 역시 기업보다 은행쪽에서 나와야 한다.

은행도 기업이다.

더구나 자기 돈도 아닌 남의 돈을 관리하는 은행에 무작정 신용대출 확대
만을 요구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방대한 규모의 부실채권, 최근에도 잇따라 드러나는 각종 금융사고,
엄청난 주식평가손의 편법처리 현실등은 은행의 내부개혁과 경영쇄신이 보다
절실함을 말해준다.

신용대출문제의 해답도 그 속에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