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옥이 습인이 떠다준 세수물로 세수를 하고는 대부인에게 아침 문안
인사를 드리러 건너갔다.

그 사이에 대옥이 보옥의 방으로 와 이것저것 뒤적이다가 "남화경"를
펼쳐보았다.

거기서 어제 보옥이 "거협편"뒤에 써놓은 글을 발견하고는 부아가
나는지 이맛살을 찌푸렸다.

"뭐? 대옥의 영특함을 재로 만들어버리면 그총명을 사모하는 마음이
없어질 거라고? 그래도 내가 영특하다는 것은 아는 모양이지"

대옥은 냉소를 띤 채 입을 비쭉이며 옆에 놓인 붓을 집어드어 보옥의
글 밑에다 자기도 시를 한수 지어 적어놓았다.

제멋대로 붓장난을 누가 하였는가 "남화경"의 장자 글을 흉내내었네
자기의 무식함을 부끄러워하지는 않고 추한 말로 남을 탓하기만
하였구나 대옥은 붓을 놓으며 통쾌하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자기도 대부인에게 인사를 드리러 정방으로 건너갔다가
왕부인의 거처로 가보았다.

그런데 왕부인의 거처에는 희봉이 병이 난 딸아이 대저를 의원에게
보이고 있었다.

의원이 대저의 맥을 짚어보는 동안 희봉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이
긴장된 모습으로 그 진맥 결과를 기다렸다.

드디어 의원이 입을 열었다.

"천만다행입니다.

아이의 몸에 열이 나는 것은 다른 병 때문이 아니라 홍역을 앓느라
그런 것입니다"

희봉이 가만이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물었다.

"홍역이 심한가요? 곧 나을 수 있겠습니까?"

"좀 심하긴 하지만 그리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누에와 돼지꼬리를 구해서 쓰도록 하십시오"

희봉은 의원이 다녀간 후 집안을 대청소하고 홍역과 천연두를 다스리는
여신인 두진랑랑을 정성스럽게 모시었다.

그리고 집안 사람들에게 기름냄새를 풍기며 음식을 지지고 볶는 일을
삼가하도록 지시하였다.

또한 부부관계를 멀리 하기 위해 남편 가련으로 하여금 바깥 서재로
침구를 옮겨 아이의 병이 나을 때까지 거기서 기거하도록 하였다.

유모와 하인들에게는 붉은 천을 내주어 그 천으로 옷을 해 입게 하였다.

붉은 색은 병마를 내어쫓는 부적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었다.

희봉은 의원을 두 사람이나 불러 바깥 사랑채에 기거하도록 하면서
아이의 병을 치료하게 하였다.

그러기를 열 이틀 하였는데 그 동안에 가련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매일 두진낭낭에게 희봉과 함께 치성을 드리는 것은 그런 대로 견딜
만했지만 부부관계를 끊어야 하는 것은 참기 힘든 일이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