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간 프랑스 역대 최장수 대통령을 지내며 프랑스의 국제적 역할을
높이는데 기여한 프랑수와 미테랑의 묘비에는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고 적힐 것이다.

그는 지난해 4월 대통령직 퇴임 한달을 앞두고 펴낸 회고록에서 자신의
묘비에 빌리 브란트의 그것과 똑같이 쓸 것을 소망했다.

미테랑전대통령은 레지스탕스요원으로서, 반유대주의를 신봉한 나치협력자
로서의 상반된 이력을 밟았고 대통령당선 후에는 이른바"사회주의 실험"을
전개한 현대프랑스사의 증인이었다.

그는 특히 유럽통합을 주도, 한때 세계사를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로 꼽히기도 했다.

지난 81년 당선된 미테랑전대통령은 세계인의 주목속에 "사회주의실험"을
단행, 성공과 좌절을 겪었다.

그는 스스로 사형제도폐지, 탈중앙화, 제3세계주민보호 정책 등을 성공으로
꼽았다.

그러나 민간은행의 국영화, 부유세부과등의 급속한 개혁정책은 경기침체를
올고와 86년 선거에서 패배했다.

이로써 우파 시라크총리와 "동거"하는 곡절을 겪었다.

그는 대통령선거에서 지난 65년 드골에, 74년 지스카르 데스텡에 연패,
"3수"끝에 당선된 집념의 정치인이었다.

미테랑은 회고록에서 정치관을 이렇게 요약한다.

"국가원수에겐 두가지 한계가 있을 뿐이다. 하나는 국민에 의한 제지이고
하나는 의무감이다"라고.

그는 이런 표상을 등대삼아 정치에 임하면서 동시대인들에게 "세상을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하고 싶어" 글을 썼다.

미테랑은 청년시절 문학지망생이었을 만큼 유려한 문체로 수상 일기
정치평론서 십수권을 펴낸 문필가이기도 했다.

톨스토이 앙드레 지드 등을 말년에도 탐독했던 그의 문장은 당대의 대가들
이 높이 평가하는 수준이다.

그러나 그는 2차대전당시 비시정부 기관지에 반유대주의를 역설한 글을 쓴
나치주의자였다는 사실이 말년에 폭로되면서 "신념" 아닌 "시류"에 영합한
정치인이란 평가를 얻기도 했다.

이는 그가 레지스탕스로 활동한 사실조차 빛바래게 했다.

미테랑은 1916년 10월 프랑스 남서부의 작은 마을 자르냑에서 역장의 아들
로 출생했고 파리정치대학(시앙스포)에서 법학 문학 정치학등을 공부했다.

< 유재혁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1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