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인들이 조선에 통상을 요구해 오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에 들어와서
였다.

1831년 영국상선이 충청도 해안에 나타나 무역을 요청한 것을 필두로
프랑스 미국 러시아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투며 조선의 굳게 닫힌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이처럼 빈번해진 통상요구 외국선의 출몰은 당시 국내 사정도
불안했던 조선조정이 한층 더 문단속을 하게 만들었다.

서양인과의 일체교섭은 위험한 것으로 간주돼 외국과의 통상은 "국금"으로
정해졌고 천주교 탄압이 강화됐다.

쇄국정책을 표방하는 대원군치하의 조선과는 평화적인 교섭에의 통상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챈 서양 제국은 무력위협으로라도
통산관계를 맺으려 들었다.

이런 "포함외교"(Oun Diplomacy)정책의 결과로 발생한 것이 한국사에서
"병인양요" "신미양요"로 부르는 사건이다.

1866년에 일어난 "병인양요"의 표면상 이유는 프랑스선교사 학살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보복이었다지만 실제로는 무력적 위협으로라도 통상관계를
맺으려는 "포함외교"의 결과였다.

그러나 출동한 로오즈함대는 한강어구를 봉쇄하고 강화읍을 점령해 약탈을
자행했으나 끝내 조선군의 강한 공세를 견디다 못해 아무 소득없이 퇴각하고
말았다.

1871년에 일어난 "신미양요"는 "포함외교"에서 미국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1866년 대동강에서 통상을 요구하던 제너럴숴만호가 평양군민들의 화공으로
침몰해 버린것을 기화로 미국이 남북전쟁이래 최대규모의 해군병력을 동원해
단행한 이 조선원정의 실질적인 목표도 조선개항이었다.

미 아시아함대사령관 로저스제독이 이끄는 기함 콜로라도호를 비롯, 군함
5척 해병 1,230명 함재대포 85문을 적재한 세계최강의 대군과 강화해협에서
맞붙은 이전투는 전황으로 보면 미군의 승리였지만 미국은 끝내 조선개항의
의지는 관철시키지 못하고 퇴각해야 했다.

미국의 페리제독이 이끈 함대가 1854년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미.일조약을
체결한 것과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미국측이 보복상륙작전을 벌이겠다고 위협했을때 조선측은 "주권침해"
"영토침략행위"라고 규탄하면서 협상및 사죄를 단호하게 거절했다는 기록을
보면 당당했던 당시 조선조정의 정황이 짐작된다.

미국이 정초부터 한국등 주요교역국에대해 무역협정을 이행하는지 여부를
감시하는 기구를 설치하겠다는등 통상압력을 강화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미국인들이 신중상주의적 사고에 빠져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도 방어적 보호주의 통상정책에서 탈피해 적극적 공세를 펼 때가
아닌가 싶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