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윤 <외대 교수>

지난해 12월14일과 15일 양일 동안 방콕에서 열렸던 제 5차 정상회담에서
ASEAN 회원국의 수뇌들은 "보다 광범위한 경제통합을 향한 새로운 분야의
협력"을 시작한다는데 합의하였다.

본격적인 경협논의를 시작한 지난 1992년의 싱가포르 정상회담 이래로
ASEAN의 회원국들은 다방면에 걸쳐 실질적인 협력관계를 숨가쁘게
증대해 나왔다.

AFTA라는 가시적인 경협성과에 버금가는 주요 사안으로 아세안지역포럼
(ARF)을 중심으로한 안보협력 분야의 성과를 들 수 있다.

이러한 ASEAN의 태도변화는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ASEAN의 외교적 성과에 대한 자신감이다.

ASEAN은 캄보디아 분쟁해결에 앞장 서서 중소관계 복원에 일조를
하였으며, 베트남을 적대적 국가에서 효혜적 관계의 회원국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동남아의 정치적.안보적 분위기를 일신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 다른 하나는 예상보다 훨씬 빨리 단행된 미군의 필리핀 기지 철수와
소련연방의 붕괴, 중국의 동남아 및 동아시아에 대한 외교공세,
무역마찰에 따라 불투명한 미일미일관계 전망, 그리고 아태지역에서
미군감축에 따른 일본의 급격한 정치적.군사적 역할증대와 중국의 재래식
지상 전투력 강화 및 해.공군력 증강에 따른 남중국해에서의 군사력
팽창기도 등 예측불가한 동남아 지역의 안보 상황이 그것이다.

ASEAN국가들은 이와 같이 급변하는 지역안보적 상황에서 자신들이 역외
국가들에 의해서 제기된 안보구상에 계속 소극적인 태도를 보일 경우 보다
강력한 외부세력에 의해서 새로운 안보구도에 피동적으로 편입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할 것이라는 공통된 인식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ASEAN은 이제까지의 외교적 성과를 바탕으로 새로운 다자간
안보논의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이니셔티브를 취하려는 야심찬 시도를
전개하게 된것이다.

작년 7월의 방콕회의에 이어 8월 브루나이에서 개최된 제 2차 전체회의
등 두 차례의 회합에서 ARF는 몇가지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첫째는 냉전기간을 통해서 적대적 관계에 있던 몇몇 나라들을 포함하여
아태지역의 모든 주요국가들과 EU의 대표가 아태지역의 정치 및 안보협력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자리를 같이 했다는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들 수 있다.

둘째로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와 캄보디아 평화정착 문제, 동남아의
비핵지대화 문제, 그리고 한반도 문제까지를 포함한 이 지역의 광범위한
안보문제가 공식적으로 논의됨으로써 ARF가 지역안보 협력체로 발전할
가능성을 제시하였다는 점이다.

셋째는 ARF가 정치.경제 및 사회적 문제까지 포함하는 "포괄적 안보
( comprehensive security )"개념에 입각하여 역내 평화와 안정을 이룩하기
위한 수순으로 신뢰구축-예방외교-분쟁해결 등 3단계의 점진적 발전방향
합의에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이를 위해서 효과적인 ARF운영을 위한 정부간 협력채널과 각종 위원회의
구성 등 모든 절차를 완료함으로써 역내 안보협력의 실질적인 가능성을
보장받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ARF의 성공적이며 장기적인 운영은 그리 간단치 않은 것이라는
비관적인 분석도 있다.

기본적으로 ASEAN이 이니셔티브를 쥐고 있는 ARF는 동남아 지역안보에
일차적 관심을 집중함으로써 남북한 문제, 중국.대만 문제, 일본.러시아 간
북방 영토문제 등 중요한 동북아 지역의 안보문제를 심도있게 다루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우선적으로 대두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특히 한국은 한반도 문제를 포함한 동북아의 제반
안보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 별도로 동북아다자간안보대화체(NEASD)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를 ARF와 동시에 병행하려는 외교적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보다 더 중요한 다른 하나는 ARF를 주도하고 있는 ASEAN의 리더십
문제이다.

미.일.중.러시아 등 역내 강대국이 모두 참여하고 있는 ARF에서
ASEAN의 이니셔티브를 이들 4강이 언제까지 어느 정도나 존중해
주겠느냐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지적에도 불구하고 아태지역의 안보구조가 강대국
간의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혀져 있어서 어느 특정국가를 중심으로 협의체를
구성한다는 것이 가까운 장래에는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당분간
이 지역의 다자간 안보논의와 관련하여 현재로서는 ARF이외의 획기적인
대안이 있을 수 없다.

<본사/싱가포르 동남아연구소 제휴>


(한국경제신문 1996년 1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