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련은 평아를 안고 귀여워해주는 척하며 슬그머니 손을 뻗어 평아의
소매 속에 들어 있는 머리카락 뭉치를 집으려 하였다.

그러자 평아가 얼른 그 머리카락 뭉치를 꺼내어 손에 쥐고는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였다.

"내가 너를 수시로 안아주고 온갖 패물들도 몰래 선물로 줄 테니
그 머리카락은 나에게 돌려다오"

가련은 평아가 계속 완강히 버티자 이번에는 달콤한 말로 유혹하며
사정조로 나왔다.

"머리카락을 돌려주면 그 다음부터는 내 몰라라 할 게 뻔해요.

제가 주인 어른님의 마음을 모를 줄 알고요.

이 머리카락은 주인 어른님으로 하여금 약속을 지키도록 해주는
보증물이에요.

그러니까 이 머리카락은 나에게 보물인 셈이죠. 만약 주인 어른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날에는 이 머리카락을 주인 마님에게 내보일 테니까
알아서 하세요"

그러면서 평아는 더욱 세게 머리카락을 거머쥐고 있었다.

결국 가련이 머리카락 빼앗는 것을 포기한 듯 한숨을 푸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래 알았다. 그 머리카락은 네가 갖고 있으려무나.

근데 제발 마누라 눈에만 띄지 않도록 해다오"

가련이 이렇게 나오자 평아는 약간 방심을 하며 가련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면서 말했다.

"주인 어른님만 약속을 지킨다면 이 머리카락은 세상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가련은 평아를 극진히 사랑하는 것처럼 두 팔에 힘을 주어 평아의 몸을
자기 쪽으로 더욱 끌어당기고는 한 손으로 평아의 팽팽한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평아는 머리카락을 쥐고 있는 손마저 풀릴 정도로 온몸에 맥이 빠졌다.

그 다음 순간, 가련이 손을 뻗어 평아의 손에서 머리카락 뭉치를
홱 빼앗아 자기 허리춤에 넣어버렸다.

가련에게 속은 것을 안 평아가 발을 구르며 억울해 했으나 이미 때는
늦고 말았다.

가련이 능글능글 웃으며 또 평아를 안으려 하자 평아는 화를 내며
방 밖으로 나가 가련에게 앙탈을 부렸다.

"어디 두고 보세요. 다음번에는 주인 어른님을 감싸주나 봐요"

그때 마침 희봉이 뜨락으로 들어서면서 그 광경을 보았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방 밖에서 하고 있니?"

희봉이 평아에게 묻자 오히려 방 안에 있는 가련이 바짝 얼어붙었다.

"바깥방으로 건너간다는 인사를 하고 있는 거예요"

평아가 슬쩍 둘러대자 가련이 가만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