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영진 <본사 상임고문>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도 울었나 보다''

미당의 ''국화 옆에서''란 시구다.

요즘 입가진 사람, 글깨나 쓴다는 사람이면 거르지 않는 한국병의
진단과 처방을 접할때마다 이 구절이 떠오르곤 한다.

대자연이 무심한 꽃 한송이 피움에 그리 큰 진통이 따르다면 한 사회,
한 나라가 발전하는 도상에서 이만한 울부짖음 쯤은 오히려 당연하지
않은가.

''목이 메도록 더 울어라!''하는 위안을 그 몇마디에서 얻는 심정이다.

바야흐로 세계 판도는 엄청 큰 변화를 향해 용트림하고 있다.

소련 해체후 동구 공간과 중동 전역이 미구사력의 배타적인 영향권에
흡수되는 중이다.

중국의 국력신장 가속화와 그에 대응하는 일본의 숨소리가 이미
거칠고, 하시모토 등단으로 한 옥타브 높아질게 분명하다.

경제가 성장하며 독자성을 강화해온 동남아는 구종주 유럽에 직접
줄을 대기 시작했는가 하면 인도도 긴잠을 깨고 성장에 자신을 얻어
핵실험까지 벼르고 있다.

마치 지구판 운동같은 거대변화가 순간으론 느린듯 하나 일정기간을
두고 보면 엄청 빠른 속도임에 놀란다.

그 와중에 한반도는 겁이 없어선지, 철이 덜 나선지 분단국이란
주제도 잊은 듯 남-북이 안으로 부글부글 끓고 마주해선 으르렁거린다.

이러다 20세기 넘을때 당한 불운을 21세기 고개에서 다시 당하지
말라는 보장은 어디도 없다.

그러나 이내 미당의 시구로 돌아가면 위안이 온다.

30여년 겪은 변화의 폭은 음미할수록 엄청나다.

그 변화가 아직도 연속인데 소쩍새 울음 몇배 더한 진통도 사양치
말아야지 평온만 바람은 욕심 아니면 소극성이란 결론에 도달한다.

사실 30여년 사이 국민소득이 백달러미만에서 만달러로 백배이상
늘었다는 통계는 화폐가지 하락을 감안한다 해도 선진 나팔소리로
불신받기 십상이다.

그렇지만 찬찬히 따져보면 그게 아니다.

식생활부터 보자.

가령 그때 가장의 밥상에 계란 찌개라도 올린 집은 손가락으로 셀
정도였다.

그뒤 계란이 천덕꾸러기가 된지는 벌써 오래다.

육류 음료 외식 건강식 등 늘어가는 식비를 30년전과 비교하면
백배가 되고도 남는다.

짚신 고무신 운동화 지게 달구지 자전거 자리에 들어선 것은 무엇인가.

지금의 신발류 각종 교통수단을 가격환산해 대비하면 역시 백배는
문제가 아니다.

다시 입성에서 조명 냉난방 수세식 등 의주생활까지 들여다 보면
소득 백배증은 과장이 아님을 터득한다.

다만 여기서 빈부차와 개발의 공과는 잠시 논외로 하자.

문제는 요즘 단골 화두인 ''소득 만달러시대의 의식''에서 발생한다.

발제는 한결같다.

생활수준(물질문명)은 선진국 문턱에 왔는데 사고방식 행동양식
공중질서(정신문명)는 후진국수준 그대로니 큰 일이란 것이 토론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왜 그러냐는 원인, 어쩌면 좋으냐는 처방에선 정곡을 비켜두고
뱅뱅 헛바퀴만 돈다.

왜 그런가.

주로 해외 유학파는 구미를 준거삼아 한국의 현실이 동떨어짐을
논증한다.

이에 주로 국내파 우국열사들은 미풍양속 동방예의 유고윤리를 총동원,
국내문제를 서구의 잣대로 재지 말라고 핏대를 올린다.

해외파의 방어선은 무너진다.

국적을 의심받을까 겁이 나서인지, 이내 수세에 몰리고 결국 토론은
죽도 밥도 아닌 용두사미로 끝난다.

어느 한쪽으로 중론이 모이는것도 아니어서 원점 회귀다.

여기서 결여된 것이 솔직성이다.

몽매간 추구해온 경제발전은 일본식 화혼양재도 아닌 무조건
서구화였다.

제조업의 메커니즘 노하우 무역방식 마케팅에 이르기까지 그 백%
구미를 직접 또는 일본 매개로 본뜨지 않은 것이란 없다.

비록 원본에 국내 개량을 첨가한것도 있고 발명도 없지는 않다.

하나 공업화 산업화 도시화의 모델이 구미가 아니라고 잡아뗀다면 자기
기만이다.

그렇다면 물질 의식주는 서구화하면서 의식과 질서는 가령 1960년
시점에서 끄떡않고 고정할수 있는 것인가.

한마디로 불가능하다.

자전거를 타려면 핫바지 대신 양복바지를 입어야 하듯이 판이해진
제도와 생활양식에 적응하려면 알맞은 새기법을 익혀야 함은 당연하다.

한마디로 온정주의를 합리정신으로 바꿔야할 일들이 일일이 꼽을수
없을만큼 주변에 산적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에 우선 몇주 앞에온 구정 과세가 있다.

귀성교통 분산의 이점 말고는 80년대 이후 정권들이 표따기 욕심하나로
역사르 역전시킨 적례다.

역시 물건너간 얘기지만, 일제가 19년 사용한데 비해 건국의 산실
등으로 해방후 50년을 애용하던 총독부건물 철거도 과거청산이라
강변할순 없다.

되풀이해선 안될 일로 한번더 짚고 넘어가야 한다.

더 걸작은 선거에 이골이난 여-야가 요즘 하는 짓거리다.

당선 가능성에 자승자박, 이름석자 팔렸다 싶으면 장난꾼이건,
전과자건, 반민주건 끌고 밀려 난리니 그러면서 당명을 왜 다르게
붙이나.

구태여 특색을 찾으라면 지방색 한가지니 당헌-노선 따질 이유
요만큼도 없다.

정 필요하면 경남당 호남당 충청당, 또는 K-1 K-2 K-3당 하는 쪽이
숫제 유권자 혼란이나마 덜어주는 첩경이다.

더 가깝게 세계화다, OECD다 하면서 대방송들까지 고발성 내세워
점쟁이 철학사를 다튀 등장시키니 결과적으로 그들은 판촉하고
출연료까지 챙긴다.

항간에 이리 미신이 극성하는 현실을 어디다 대고 호소해야 좋은가.

현대화는 물심의 균형을 요한다.

서양기계를 그 노하우 아니면 운전 못하듯이 양식화되는 생활엔
그에 맞는 질서규범을 익힐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버리기 아까운 고유미풍은 합리성에 걸려 수정 보완해서 써야지,
남녀7세 부동석을 고집하고도 살아남길 바라는가.

솔직하자.

(한국경제신문 1996년 1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