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노려보았다구? 난 그러지 않았는데"

보옥이 상운에게 변명을 늘어놓자 상운이 보옥의 손을 뿌리치며
쌀쌀하게 말했다.

"분명히 나를 그렇게 노려보았으면서 발뺌을 해요? 모든 일이 너 때문에
다 이렇게 되었다 하는 그런 표정이었잖아요"

"그게 아니었다구. 대옥이 화를 내고 나가니 기가 차서 나도 모르게
그런 표정을 지은 거지"

"그런 말에 누가 속을 줄 알고요"

상운이 걸음을 빨리 하여 최루를 끌다시피 해서 저쪽 모퉁이로
돌아갔다.

보옥은 멈춰 서서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후우 한숨을 쉬었다.

보옥은 머리를 두어 번 흔들고는 이번에는 대옥의 방으로 가보았다.

대옥은 방 한복판에 고개를 숙이고 서 있다가 보옥이 미처 문지방을
넘어서기도 전에 보옥을 두 손으로 떠밀어 방 밖으로 내쫓고는 문을
쾅 닫아버렸다.

졸지에 당한 일이라 보옥은 멍한 표정으로 문 밖에 잠시 서 있다가
다시 방문을 열려고 하였으나 안에서 잠갔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대옥 누이, 대옥 누이"

하며 목이 멘 소리로 불러도 보았지만 안에서는 아무 대꾸도 없었다.

상운도 달래고 대옥도 달래어 둘을 화해시키려 하였던 보옥은 오히려
둘에게 따돌림을 받은 셈이었다.

보옥은 몇번 더 불러보다가 낙심이 되어 그대로 우두커니 문 밖에
서 있었다.

습인은 보옥이 어디로 갔나 하고 찾으러 나왔다가 보옥의 그런 모습을
보고는 또 대옥과 언쟁이 붙었구나 하고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런 때는 보옥에게 말을 붙이기도 힘든다는 것을 습인은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대옥 아가씨에게 저렇게 신경을 쓰다가 우리 도련님 죽고 말지. 습인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 돌아섰다.

대옥은 한참후 문 밖이 조용하자 보옥이 돌아간 모양이구나 하고 문을
살며시 열어보았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보옥이 여전히 그 자리에 붙박힌 듯 말뚝처럼 서 있는 게 아닌가.

대옥이 얼른 문을 도로 닫으려고 하자 보옥이 상체를 문에 기대며
안으로 들어왔다.

대옥도 이번에는 보옥을 밀치거나 하지 않았다.

다만 보옥이 안으로 들어오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이 침대로 가 벌렁
드러누워 이불을 뒤집어썼다.

보옥이 침대로 다가와 이불을 끌어당겼으나 대옥은 뒤집어쓴 이불을
두 손으로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

"대옥 누이, 왜 나에게 화를 내는 거야? 말 좀 해봐"

보옥이 결국 힘을 주어 이불을 끌어당겨 대옥의 얼굴이 드러나도록
하였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