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업의 정도는 시장의 크기에 의해서 결정된다"

애덤 스미스가 한 말이다.

대외개방은 시장영역을 넓히고 분업정도를 심화시켜서 교환경제의 이 점을
더욱 크게한다.

이것이 자유무역론의 기본원리이다.

그러나 이 원리는 개별산업을 부분적(piecemeal)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개방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개별국가가 어떤 정책을 취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이 특수상황에 맞는 대외개방정책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자유무역의 기본
원리를 어떻게 재해석해야 하는가.

실례로 국내금융산업을 보자.

금융산업은 우리경제에서 제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대표적인 산업으로
손꼽히고 있다.

금리자유화가 3단계에 이르고 있으나 사정은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은행자금에 대해서는 언제나 초과수요가 존재하고 은행의 문턱은 높기만
하다.

현재의 금융구조는 은행간에 일종의 금리 카르텔이 형성되어 있는 형상이다.

이러한 금리카르텔이 가능한 것은 은행산업에 대한 신규진입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각종 행정규정과 행정지도에 의해서 관계부처 은행들간에 중층적
관계가 맺어져 있다.

은행들 스스로 카르텔 시장구조를 즐기고 있으며, 안된 말이지만 재경원은
이런 상황을 방조하고 있다.

은행임원의 선임은 공공연히 정부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나마 정치적으로 결정되지 않으면 다행이다.

은행의 경영통치구조(corporate governance)는 본질적으로 경영진이 경영
성과에 대해서 책임을 지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볼 수 없다.

새로운 금융상품의 개발은 재경원의 허가사항이다.

은행운용의 사소한 부분들까지 통화관리차원의 계수관리를 위해서
은행감독원의 통제를 받고 있다.

혁신적 금융기법의 도입이란 원천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풍토이다.

대외개방은 국내금융산업에 외국은행의 신규진입을 의미한다.

그것은 새로운 금융서비스를 공급할 것이며 선진금융기법을 전파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금융산업이 안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정부는 제도개혁을 통하여 은행이 자율적 경영통치구조를 갖도록 해주어야
한다.

새로운 경영통치구조에서 은행경영진은 경영성과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자율적 경영체제가 확립되어야 한다.

금융산업의 진입 제한을 낮추어서 대규모 은행뿐만 아니라 중소형의
은행설립도 가능하게 해야 한다.

이들이 서비스로 경쟁하게 하고 경영이 부실한 경우 도태될 수밖에 없도록
경쟁풍토를 조성해야 한다.

왜 이러한 조치들이 시행되지 못하고 있는가.

이유는 자명하다.

이러한 조치를 시행할 위치에 있는 어느 누구도 스스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개혁조치를 취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외개방은 기존업계나 관계부처가 개혁조치를 거부할 명분을 더이상 갖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가진다고도 볼 수있다.

실제로 대외시장개방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외부적 계기가 마련되지
않으면 개혁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대외개방이 부분적.점진적으로 추진될 경우 그것이
개혁조치의 시행을 촉진하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다.

외국금융기관의 일차적 관심은 국내금융산업에의 시장접근(market access)
에 있지 우리의 개혁조치에 있지 않다.

실제로 OECD에서도 가입조건을 심사할 때,문제의 행정규제가 국내시장에
대한 외국기업의 시장접근을 막거나 차별대우를 규정한 것이 아니라면
건전성규제(prudential regulations)라고 해서 문제시하지 않고 있다.

결국 최악의 시나리오는 외국금융기관의 국내시장진입은 허용되어진 상태
에서 업계에 대한 통제권을 놓지 않으려는 관계부처의 이기주의와 시장진입
장벽을 고수하려는 기존업계의 기득권옹호를 위한 로비가 작용하여 국내
금융기관에 대한 규제는 계속 유효하게 되는 상황이다.

즉 국내기업에 대해서는 자유로운 기업활동을 못하게 규제로 묶어놓고
외국기업들의 국내시장영업은 허용해주는 상황을 의미한다.

이 경우 대외개방이 국내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계기로 활용되기보다
외국기업에 의한 국내시장잠식의 기회로 연결될 가능성을 그만큼 높여주게
된다.

물론 개방이후 모든 국내산업이 경쟁력을 가진 산업으로 살아남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필요한 개혁조치를 제때 취하지 못했기 때문에 잠재력을 가진 국내
산업이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대외개방에 앞서 국내시장의 기능을 먼저 활성화시키고 그 연후에
외국과의 교류를 열어 국내시장의 영역을 해외로 확장한다"

아마 이것이 자유무역의 기본원리를 우리 현실상황에 맞도록 재해석하는
방법일 것이다.

이것은 대외개방정책이 시행되기에 앞서 관련산업에서 국내시장의 기능
활성화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제도개혁이 선행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정책당국의 개혁의지가 관계부처와 기존업계의 이기주의를 누를 수
있을 만큼 강할 때만 가능한 일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