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옥은 더이상 대옥에게 변명하고 싶지도 않고 하여 휑하니 방을
나와버렸다.

"흥, 갈테면 가라지. 가서 내곁에는 영영 오지 않았으면 좋겠네"

대옥은 여전히 토라진 마음을 풀지않은채 다시 이불을 끌어당겨 머리를
덮으여 돌아누웠다.

자기방으로 돌아온 보옥 역시 서운함과 분이 삭아지지 않아 눈물을
글썽이며 이리 저리 왔다 갔따 안절부절 못했다.

여자 둘을 달래서 화해시키는 일에 무참하게 실패한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인간관계들을 원만히 맺어갈 수 있을지 난감한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런 중에 "남화경"에서 읽은 구절들이 떠올랐다.

"재주가 있는 자는 일하느라 애쓰게 마련이요, 똑똑한 자는 근심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무능한 자는 별로 바라는 바가 없어 배불리 먹고는 놀기만 하니
마치 닻줄 풀린 배와 같도다"

보옥은 차라리 장자가 말한 그런 무능한 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면 지금과 같은 고민들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 아닌가.

또 다음과 같은 구절도 떠올랐다.

"산의 나무들은 스스로 자기를 노략질하고, 샘물은 스스로 자리를
도적질한다"

산의 나무들이 아름드리 큰 나무로 자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자리를
베어가라고 과시하는 것고가 같으므로 결국 스스로를 노략질하는 셈이
된다.

그리고 샘물이 맑게 솟아나는 것은 사람과 짐승들로 하여금 와서 마구
퍼마시도록 불러대는 것과 같으므로 이것 역시 스스로를 도적질하는
셈이 된다.

보옥은 산의 나무가 되려고 하였고 샘물이 되려고 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여러가지 근심이 가시처럼 자기를 찌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따지고 보면 상운과 대옥같은 주변 살마들이 보옥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옥 스스로 그런 괴로움을 자초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들을 하다보니 보옥은 더욱 마음이 안타까워져 침대에 엎드려
소리내어 울었다.

습인이 달려와 보옥을 달래려고 하였으나 보옥은 습인을 뿌리치며 방을
나가도록 하였다.

"뭣 때문에 우는지 알만하군. 여자들의 말 한마디에 사내 대장부가 저리
울고불고 야단을 하니 쯧쯔 장차 도련님이 어떤 인물이 될지 걱정스럽군"

습인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보옥의 방을 나와 시녀들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 방에서도 보옥의 울음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