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간 소리를 내어 울고 나니 보옥은 어느 정도 마음이 개운해졌다.

뭔가 인생의 진리를 터득한 것도 같았다.

그래서 책상 앞으로 다가가 붓을 뽑아들고 선승들이 득도할 때 짓는
게문 비슷한 것을 한 수 써내려갔다.

너도 나도 깨달았다 하고 마음으로 뜻으로 깨달았다고들 하나 더 깨달을
것이 없기까지 깨달아야 참으로 깨달은 것이라 참으로 깨달아야 스스로
설 수 있는 경지에 이르리라 그 다음 보옥은 자기가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내용을, "노지심이 술에 취해 오대산을 소란케 하다"라는 연극에 나오는
"기생초" 노래 가사를 흉내내어 적어나갔다.

내가 없다면 원래 너도 없으리 남이야 어떻게 하건 상관없어라 자기들
마음 내키는 대로 오고가라지 망망한 슬픔과 기쁨에 빠질 필요도 없고
가깝고 먼 것을 일일이 따질 필요도 없어라 전에는 안타까이 속을 태우며
연연해 했으나 지금 와서 생각하니 다 부질없는 일이로다 보옥은 자기가
지은 글을 읽어보고는 마음이 흐뭇해져 미소를 머금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앞으로 여자들 등쌀에 웃고 울고 할 일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자 보옥은 온몸에 긴장이 풀리면서 스르르 졸음이 몰려왔다.

보옥은 그 글을 적은 종이를 책상 위에 놓아 둔 채 침대로 가 잠이
들었다.

보옥이 잠이 막 들었을 때 대옥이 그제서야 자기가 보옥에게 너무 했다
하는 생각이 들어 보옥의 방으로 와보았다.

방 앞에서 서성거리던 습인이 대옥이 다가오는 것을 보자 손가락을
입에 갖다대며 보옥이 자고 있다는 표시를 해보였다.

대옥은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돌아가려 하였다.

"잠깐만요. 여기 보옥 도련님이 글을 써놓은 것이 있는데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습인이 건네주는 종이를 받아들고 읽어보던 대옥이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그 종이를 돌돌 말아 자기 방으로 가지고 갔다.

마침 상운이 대옥의 방으로 건너와 아까 대옥이가 어릿광대를 닮았다고
놀린 것을 사과하였다.

대옥은 이미 마음이 풀려 있는지라 상운을 받아주었다.

보채도 대옥의 방으로 놀러와 셋이 함께 보옥의 글을 읽으며 킥킥
거렸다.

그러다가 보채가 그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서 하녀에게 그것을 불태우
라고 하였다.

다음날 셋은 보옥에게로 건너와서 그 글을 꼬치꼬치 따졌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