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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도 여성대사가 탄생됐다.

건국이후 첫 여성대사로 내정된 이인호서울대교수(60.서양사)는 러시아사
연구로 미국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귀국, 대학강단에 서면서
역사문제뿐만 아니라 교육 사회 여성문제등에도 폭넓은 관심을 보여왔다.

깨끗하고 고운 얼굴과 함께 일생동안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온 사람
특유의 침착함과 당당함을 지닌 이교수는 대사로 내정된지 얼마되지
않았음에도 불구, 핀란드에 대한 상당량의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부임준비에 여념이 없는 이교수를 서울 서초구 반포동 서래아파트자택에서
만나 첫여성대사 내정자로서의 심정과 앞으로의 계획을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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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담 = 박성희 문화부장 ]]]

-먼저 우리나라의 첫 여성대사가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갑작스런 일이라 당황하셨을 듯도 한데요.

처음 연락받은 것은 언제였습니까.

<>이교수 =지난해 12월초였습니다.

생각치 않은 일이었던 데다 교수로 정년퇴임할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착잡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논문지도를 하던 대학원생들도 있고. 학교를 떠나기로 마음먹는 것도
쉽지는 않았구요.

하지만 여성이 대사직을 맡는다는 것이 지니는 상징성과 의의를 감안,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준비에 상당히 바쁘시죠.

서울생활 정리와 핀란드에 대한 사전조사등 할일이 태산같을 텐데요.

<>이교수 =내정된뒤 아그레망이 오려면 시간이 좀걸릴 것으로 예상했었는데
뜻밖에 아그레망이 빨리 도착했어요.

3월초엔 부임해야 하는데 사전에 준비해야 할 것들이 적잖은 만큼 상당히
바쁘게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핀란드와 처음 수교한 것이 언제죠.

<>이교수 =75년입니다.

첫 대사는 우리 외교계의 원로인 윤호근씨였습니다.

지금까지는 주로 군출신이나 직업외교관이 맡았었죠.

-현재 우리나라는 스칸디나비아3국에 각각 대사를 파견하고 있나요.

<>이교수 =그렇습니다.

3국에 모두 대사관이 있죠.

그러나 수교한지 얼마 안되는 발트3국에는 따로 대사가 없습니다.

제 경우에도 인접국 에스토니아의 대사를 겸하게 됩니다.

-핀란드에서는 핀란드어를 사용하는 걸고 압니다만.

핀란드어는 어느 언어권에 속하는지요.

<>이교수 =핀란드어는 헝가리어와 같은 갈래인 "피노 우그리안어"입니다.

에스토니아도 핀란드와 같은 언어권에 속합니다.

영어와 러시아어를 하는데는 별 문제가 없고 따라서 외교업무에는 지장이
없겠지만 그래도 핀랜드어를 몰라 가기전에 조금이라도 공부하려니 자료가
흔치 않더군요.

다행히 미국에 사는 친구가 어학테이프를 구해줘서 듣고 있지만 아직
생소하죠.

하지만 국민 대부분이 국민학교때부터 배워 영어를 잘하는 걸로 압니다.

핀란드사회 전반에 관해서는 주한 핀란드대사관과 친지로부터 자료를 구해
공부하는 중입니다.

-핀란드 주재 일본대사는 어떤 사람인가요.

동양권의 다른 외교관의 상황은 어떤지요.

<>이교수 =우연인지, 핀란드주재 일본대사(다까하라 수미꼬)도 여성입니다.

지난해에 부임했다더군요.

일본에서 경제기획청장관과 체육회장을 역임했다고 들었습니다.

84~87년 중국에서도 여성대사(린 아일리)를 핀란드에 보낸 적이 있었어요.

-일본의 경우도 여권이 그리 신장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여성대사
발령은 우리보다 빨랐군요.

<>이교수 =일본은 85년 UN주재 나이로비 여성대회에 맞춰 정책적으로
첫 여성대사를 임명했다고 들었습니다.

외무부에 적당한 인사가 없어서 노동계쪽에서 발탁했다고 하더군요.

우리도 95년 UN북경여성대회에 맞춰 지난해 6월쯤 여성대사를 냈으면
국제적으로 이미지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됐을텐데 아쉽다고 말하는 분이
많습니다.

저 역시 연전에 크리스찬아카데미에서 조사한 우리나라의 "여성세력화
지수"가 세계 110개국중 90위수준밖에 안되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같은 동양권, 그것도 일본의 대사가 여성이라는 사실은 적잖은 부담으로
작용할 듯합니다만.

<>이교수 =아무래도 부담이 느껴지죠.

그래서 일본사정도 살피고 어떤 분인지도 알아볼겸 최근 1주일간 일본에
다녀왔습니다.

-핀란드대사관 규모는 어떤지요.

핀란드에 다녀오신 적은 있으십니까.

<>이교수 =규모는 크지 않습니다.

우리공관원은 5명정도고 나머지는 현지인이죠.

핀란드에는 3년에 한번씩 열리는 "국제여학사회" 모임때문에 수도 헬싱키
부근의 에스뽀라는 곳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위치상으로 유럽의 변경이면서 아시아에 인접한 핀란드는 "유럽속의
아시아"라는 별명을 갖고 있어요.

땅은 넓은데 인구는 5백10만명정도여서 사람들이 여유있고 순박하죠.

교민은 얼마 안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핀란드에서 활동하는 한국인으로는 도예가 박석우씨가 알려져 있습니다.

부임하시면 어느 분야에 중점을 둘 계획이신지요.

<>이교수 =지금까지는 주로 경제교류에 치중했죠.

저는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교류에도 관심을 기울이려 합니다.

지금 우리에겐 정신공간내지 문화공간을 확장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핀란드 방문 당시 어느 학자의 서재에서 고대 인도인의 인장을 찍은
슬라이드가 가득한 책장을 본 적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수익과는 관련없는 분야를 연구하는데도 그사람은 국가의
지원을 받고 있었습니다.

부임하면 문화적인 면을 포함해 여러 부문의 교류를 보다 활성화시켜
양국관계를 보다 돈독히 할수 있도록 하는데 힘쓰겠습니다.

-우리나라 기업의 핀란드 진출상황은 알아보셨습니까.

<>이교수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에 나가있는 만큼은 아니더라도 크고 작은
기업이 진출해 있습니다.

파악한 바로는 진도모피가 가장 활발한 듯합니다.

제일제당이 헬싱키와 에스토니아에 연수팀을 보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대한항공은 아직 직항로는 개설하지 않고 기계정비만 하는 "테크니컬스톱"
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학계에서는 헬싱키대학과 서울대경영대가 공동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핀란드의 최근 경제상황은 괜찮은지요.

주요산업은 무엇입니까.

<>이교수 =최대 교역국은 스웨덴 러시아 영국 독일 일본등이죠.

페레스트로이카 이전에는 러시아의 중개무역 거점이었는데 개방이후
러시아가 각국과 직거래를 하는 바람에 현재는 다소 어려운 모양입니다.

최근 EU에 가입, 보조금을 받아 실업률을 낮추는 효과를 얻고 있다고
합니다.

산업은 목재 펄프 기계부문이 발달했죠.

특히 디자인산업은 유명합니다.

"이탈라"라는 유리제품은 옛방식대로 하나씩 불어서 만들기 때문에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닙니다.

하나하나가 모두 예술품이죠.

건축술 또한 뛰어나 집들이 규모는 작지만 매우 단단하고 치밀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 알바 알토가 바로 핀란드 태생이지요.

-1인당 국민소득이 꽤 높지요.

<>이교수 =미화 2만달러에 달합니다.

우리나라의 2배죠.

기후조건은 러시아보다 나을 것이 없는데도 훨씬 부자인 셈입니다.

하지만 세금이 많아 개인생활은 풍족하지 못합니다.

부부가 함께 벌어야 보통수준을 유지할 정도라고 하니까요.

-국민소득이 높은데도 세금으로 인해 개인의 삶이 풍요롭지 못하다는
대목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봅니다.

복지를 위한 세금은 중산층의 근로의욕내지 생산성을 떨어뜨린다는
양면성을 지니니까요.

<>이교수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일하는 사람들의 능률을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복지수준을
높일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불로소득자가 많다는 것이 문제겠지요.

재임기간중 시간이 나는대로 관심을 갖고 연구해보려 합니다.

-핀란드는 의회구성원의 40%가 여성이라고 들었습니다.

유럽국가중에서도 여성의 정치참여율이 그렇게 높은 곳은 많지 않은 것
아닙니까.

<>이교수 =핀란드는 여성에게 가장 먼저 참정권을 준 나라입니다.

러시아치하에 있을 때인 1905년이었죠.

진보적일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로 현명했습니다.

19세기초까지 스웨덴의 일부였다가 러시아치하에 들어가 러시아혁명
이후에야 독립했는데도 그동안 내부적으로 자치체제와 제도를 잘 정비,
독립후 국가운영에 문제가 없었죠.

내부의 체제 정비 없이 독립하려다 상태가 더 악화됐던 폴란드와는
대조적이죠.

-지난 얘기로 돌아가 러시아사를 전공한 동기를 듣고 싶습니다.

<>이교수 =국민학교 3학년때 광복을 맞았는데 당시 사람들이 꽹가리를 치며
좋아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할 정도입니다.

게다가 어려서 "우리는 약소민족"이라는 말을 많이 들으면서 "서구사람들은
잘사는데 우리는 왜 못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서울대 사학과에 들어갔는데 2학년때인 56년 미국에 계신 친척의
소개로 미웰슬리대학에서 기숙사비까지 나오는 장학금을 받게돼 유학을
떠났죠.

미국에서는 당시 스푸트니크 쇼크(57년 소련에서 세계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를 발사한데서 받은 충격)로 소련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어요.

웰슬리대학에서도 그 일로 러시아사강좌를 개설했는데 들어보니 우리역사와
상통하는 것도 많고 재미도 있어 전공하게 됐습니다.

-미국에 정착하겠다는 생각은 안하셨나요.

당시만 해도 한국사람이 러시아사를 전공하는데는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요.

<>이교수 =흐루시초프 집권 당시 소련과 미국사이에 해빙무드가 조성되고
있어서 미국학생들은 소련에 갈수 있었어요.

하지만 나는 국적을 바꾸지 않은 탓에 갈수 없었고 결국 마이크로필름을
통해 공부하고 논문을 썼습니다.

그렇지만 국적을 바꾸겠다는 생각은 한번도 하지 않았어요.

미국대학에서 강의를 한 것도 한국에 돌아오는 비행기값이라도 벌려는
생각에서였죠.

다행히 학위취득과 함께 컬럼비아대와 버나드대에 동시에 자리가
생겼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남녀차별을 별로 느끼지 못하셨을 것같은데 여성문제에
대한 관심은 언제부터 갖게 되셨습니까.

<>이교수 =70년대초 귀국 직후 국내의 가족법이 얼마나 모순투성이인가를
알고 나서였습니다.

여성의 능력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풍토를 보며 한국에서 여성으로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절감했었지요.

요즘은 많이 나아졌습니다.

-맞벌이부부의 의료보험료를 양쪽에서 모두 공제하는등 아직도 여성에게
불공평한 일들이 많습니다.

<>이교수 =유학시절 미국에 의료보험제도가 처음 생겼는데 그 과정이
치밀하기 이를데 없었습니다.

우리는 어느날 갑자기 제도를 만들면서 보험카드가 없어도 병원에 갈 수
있는 사람들을 먼저 보험에 들게 하는 아이러니를 빚었죠.

-여성문제와 함께 교육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오신 걸로 압니다.

대학입시제도 개편에 관한 글도 계속 발표하셨구요.

<>이교수 =저는 교육의 혜택을 많이 받았고 또 오래 가르쳤으니까 교육의
가능성에 대해 잘아는 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교육"과 "인력훈련"의 구분을 못하고 있습니다.

능력함양을 위한 압력은 바람직하지만 제도의 불합리성으로 인한 압력은
해소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청소년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은채 과중한 압력만
가해왔습니다.

복수지원제는 만시지탄의 감이 있지만 그래도 실시하게돼 다행스럽죠.

교육에 대한 투자도 너무 적습니다.

반대로 사교육비는 엄청나구요.

국가차원에서 교육에 과감하게 투자해야 합니다.

기여입학제도등도 운용의 묘를 살려 실시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부임하실 때까지 한달여밖에 남지 않았는데요.

그동안의 일정은.

<>이교수 =잠깐 미국에 들러 두 딸을 만나고 핀란드에 관한 자료도 수집할
계획입니다.

돌아오면 2월1일부터 대사연수, 5일부터 공관장연수에 참여하게 됩니다.

2월말 방한예정인 핀란드장관 한사람을 맞은뒤 3월초 현지로 떠납니다.

아이들은 미국에서 나서 유치원때 잠깐 한국에 왔다 다시 미국에서
자랐는데도 한국에 대한 애착이 적잖은 걸 보면 조국이 무서운가 봅니다.

언젠간 한국에 돌아와 일하겠지요.

-논문지도중이던 대학원생들은 어떻게 되나요.

<>이교수 =외국역사를 공부하려면 그나라에 가야 한다고 믿는 만큼 그동안
되도록 유학을 갈수 있도록 주선해 남은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헬싱키에 러시아에도 없는 자료를 소장한 세계최고의 슬라브도서관이 있는
만큼 부임후 제자들이나 여타 전공자들이 도움이 되도록 해볼 작정입니다.

[[[ 약력/저서 ]]]

이인호교수는 36년 서울 태생으로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 재학중 도미,
웰슬리대와 래드클리프대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하버드대에서 "캐터린대제
치하의 자유석공회 활동에 대한 재고"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컬럼비아대와 버나드대교수를 지낸 뒤 72년 귀국, 고려대를 거쳐 79년부터
서울대교수로 재직해왔다.

KBS이사 서울대소련동구연구소장 세계화추진위원회위원을 지냈고
"지식인과 역사의식" "러시아지성사 연구" "문제선생 문제학생"등의 저서를
냈다.

< 정리 = 조정애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1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