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섭이라는 판사가 있었다.

우리나라 역대 판사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판사로 꼽히는 분이다.

필자는 한때 그 판사님이 쓰신 수상록을 자주 읽었다.

책을 읽는동안 그분이 천체망원경을 마련, 별이 빛나는 밤이면 지붕에
올라가 밤하늘을 관찰하셨다는 대목에서 특히 생각을 많이 했었다.

그리고 어른이 도어 돈이 생기면 망원경뿐 아니라 현미경도 사리라고
다짐했었다.

아마도 필자는 그 분을 알기 오래 전에 다음과 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분의 망원경 이야기에 남달리 주목하게 되었던 것
같다.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필자의 선친은 평소 몸이 허약하시어 자주 병원신세를 져야 했다.

그래서 선친의 병원비때문에 필자의 집은 언제나 빚에 쪼달리고 있었다.

그런데다가 병마에 지친 선친께서는 기운도 없으셔서 어린 나보다도
힘이 없으셨다.

이에 필자는 우리집이 못사는 까닭은 오로지 선친의 탓이라고 원망
했었고 그런 아버지를 전혀 쓸모없는 사람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데 그해 초겨울 갑자기 선친께서 돌아가셨다.

장례식을 마치자 갑자기 우리집은 고도로 변했다.

위로해 주는 사람은 커녕 빚쟁이 마저도 우리집에 얼씬 거리지 않았다.

슬픈 마음은 적막감이 엄습해 있는 집때문에 더욱 외롭고 서럽게
되었다.

필자는 비로소 병들어 허약할지라도 선친께서 그동안 얼마나 소중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가를 깨우치게 되었다.

동시에 세상에는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소리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소중한 것들이 필자가 듣고 보는 것보다 훨씬 많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김홍섭 판사의 망원경 이야기를 읽고는, 천체망원경과
현미경은 필자로 하여금 더 많은 것을 보며 살 수 있게 하여 주리라 믿게
되었던 것이다.

며칠전까지 골프설계가가 써놓은 책을 한 권 읽고 있었다.

그 책의 저자는 진정으로 골프를 잘 하기 위해서는 골프코스를 알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고 했다.

타잉그라운드, 스루터그린, 해저드, 그리고 퍼팅그린의 각 구조와 잔디,
나무, 물, 모래, 바람이나 기후 등 골프코스를 구성하는 갖가지의 요소의
의미와 특성은 물론 코스설계가의 의도를 알아야 한다는 취지였다.

골프를 잘 하려면 그저 볼만 잘 치면 되는 줄 알았던 필자에게 그
책은 김홍섭판사의 망원경 이야기가 잊어버렸던 어린 시절의 다짐을
일깨웠듯 아주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렇다.

코스내의 벙커나 한 그루의 나무가 골퍼로 하여금 어떤 착각을 불러
일으킬 것인지 그 숨어 있는 뜻을 알지 못하는 골퍼라면, 아무리 멋진
샷을 날린다 하더라도 결코 좋은 스코어를 기록하지 못할 것임에
틀림없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