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옥은 자기가 도통한 체하며 진리가 어떻고 깨달음이 어떻고 한
사실이 더욱 부끄럽게 여겨졌다.

그 글을 적을 때는 세상의 허무한 것들에 대하여, 특히 여자들에
대하여 애태우지 않으리라 작정을 하였지만, 지금 자기 주위에 둘러앉아
있는 세 여자들을 보고 있노라니 여자가 없이는 무슨 낙으로 인생을
사나 하는 생각이 다시금 고개를 쳐들었다.

마음이 언짢고 괴로운 일이 있더라도 여자들과 어울리는 재미를 차마
포기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자 보옥은 자기도 모르게 이전 그대로 평상의 자세로 돌아와
대옥, 보채, 상운들과 잡담을 나누며 장난을 치고 히히덕 거리게 되었다.

모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 가운데 네 사람이 놀고 있는데, 하인이
불쑥 들어와 말을 전했다.

"궁궐로 돌아가신 후비께서 인편에 수수께끼초롱을 보내오셨습니다"

"수수께끼 초롱이라니?"

"수수께끼가 적혀 있는 초롱 말입니다.

지금 그 초롱이 대부인 마님방에 있는데 모두들 와서 그 수수께끼를
풀어보랍니다.

그리고 수수께끼를 푼 사람들은 또 각각 하나씩 수수께끼를 내어
후비께 보내도록 하랍니다"

그 말을 들은 네 사람은 대부인의 방으로 달려가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방 한복판에 젊은 태감 한 사람이 붉은 비단으로 만든
네모진 꽃초롱을 들고 있고, 그 주위로 사람들이 둘러서서 초롱에 적힌
수수께끼를 푸느라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보옥이 사람들 사이로 끼어 들어 초롱에 적힌 칠언절구의 수수께끼를
읽어보았다.

비단으로 감은 몸 소리는 우뢰 같아 요사한 귀신의 간담마저 서늘케
하네 한번 소리치면 모두들 깜짝 놀라 자빠지나 돌아보면 어느새 재로
변해 있네 이건 폭죽이잖아.

보옥은 하마터면 수수께끼의 답을 소리 내어 말할 뻔하였다.

그런 낌새를 눈치챈 태감이 주의를 주었다.

"수수께끼를 풀었더라도 입 밖에 내어서는 안됩니다.

그 답을 종이에 써서 초롱에 걸어두십시오. 그러면 제가 이 초롱을
다시 궁궐로 들고 가 후비께서 그 답들을 읽어보시도록 할 것입니다.

답을 맞춘 사람에게는 상이 내려질 것입니다"

보옥이 보니 보채, 대옥, 상운, 탐춘들도 얼굴에 희색이 도는 것으로
보아 벌써 수수께끼를 푼 모양이었다.

모두들 종이에 답을 적어 초롱에 걸기에 바빴다.

그 답 옆에는 후비에게 내는 수수께끼들도 하나씩 적혀 있었다.

대부인은 보옥의 남동생인 가환과 사촌동생인 가란도 불러들여 수수께끼
놀이에 끼도록 하였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