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뒤 미군정3년에 이어 이승만정부가 12년간 계속되던중 6.25를
겪고, 그 상흔을 치유하기에 온 국력을 집중해야함에도 불구, 방만한
국정운영으로 나라는 크게 어려웠었다.

이정권은 민생을 수습하기는 커녕 4년 더 집권하려고 60년3월15일
대통령선거에서 부정을 저질렀다.

이에 항의하는 데모가 4.19학생혁명으로 발전,민주선거에 의해 60년8월
장면내각책임제가 출범했다.

사회 각분야에 민주화가 진전되길 기대했으나 사회불안은 여전했다.

그러던 61년5월16일 라디오를 켜니 군이 계엄령을 선포했다는 방송이
흘러 나왔다.

이정권때의 혁명이라면 몰라도 민주정부하에서 군인들이 총으로 정권을
강탈했다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 할 수 없었다.

국내 모든 언론은 계엄사의 검열을 받았는데, 미군신문인
스타스&스트라이프스( Stars&Stripes )는 예외였다.

유엔군사령관 매크루더장군이 "서울을 점령한 반란군은 즉시
원대복귀하라"고 명령하고, 스나이더미국대사는 "장면총리등을 석방하라"고
반란군에 요구하는 것등을 읽을 수 있었다.

당시 나는 동양화학의 소다 애시( Soda Ash )프로젝트 매니저로서 한국
최초의 재정차관으로(59년12월 미DLF로부터 560만달러)인천에 소다공장을
건설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사반란으로 사업은 중단될 수 밖에 없었다.

미국이 불법적 군사반란과 군정에 정면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수년에 걸친 노력끝에 가까스로 자금을 확보했는데 미국이 취소 또는
동결할까 전전긍긍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부흥부차관이었던 송정범씨로 부터 박정희 당시
최고의장을 "새롭게 인식"할만한 이야기를 듣게 됐다.

송차관이 제1차경제개발 5개년계획사업의 자금부문 브리핑을 했는데,
박의장은 "왜 기술도입과 기술자 동원계획은 없는가"라고 물어 크게
당황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소다기술에 대하여 여러가지를 질문해왔다.

경제개발.공장건설에서 기술도입과 기술자동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당시 당국자들은 거의 모르고 있었는데 박의장만은 누구보다 잘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대통령은 재임시절 과학기술에 최형섭장관을, 산업정책은 청와대의
오원철경제수석을, 방위산업에는 국방과학기술연구소장 심문택박사 등
과학기술인을 중용했다.

재무 상공장관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류씨가 비서실장이 된것은 상공장관
시절 울산석유화학사업을 잘 추진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직접 들은 적이
있다.

박대통령이 비서실장을 맡으라고 했을때 "비서실장을 맡기엔 정치력이
없습니다"고 하자 "경제가 국정의 기본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박대통령은 국정의 역점을 경제발전과 과학기술진흥에 두었고, 이에
따라 경제와 과학이 크게 발전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한가지 아쉬운 점은 박대통령이 경제를 성장시키기 위해
기술자를 매우 중용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박대통령이 3선개헌 유신헌법등으로 장기집권을 도모한것엔 지금도
지지할 수 없고 공감할 수 없으나 우리나라 가난의 상징이었던 "보릿고개"를
없앴고, 기술자들을 중용했을뿐더러 기술인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었다는 것만은 우리 기술인들은 잊지 않고 있다.

과학기술인이 중시.중용될때 기업과 사회,나아가 나라의 경제가 크게
발전한다는 하나의 역사적 교훈이라고 할 것이다.

마경석 <한국엔지니어클럽 명예회장>

(한국경제신문 1996년 2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