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성자였다.

두 아들을 잃고도 고요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달랐다.

위대함은 시련에서 나온다며 투쟁을 강조했다"

닉슨이 권좌에서 물러나기 전 백악관에서 되뇌이는 독백이다.

성자와 투사는 어떻게 다른가.

올리버 스톤 감독의 "닉슨"은 20세기 최악의 정치스캔들에 휘말려
불명예 퇴진한 닉슨의 삶을 재조명한 영화.

가난한 식료품상의 아들로 태어나 최고권자에 올랐다가 종말로 치닫는
그의 생애를 따라가면서 워터게이트와 월남전, 핑퐁외교 등 역사적
사건을 추적한다.

이 영화는 그러나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감독은 현대정치사의 두꺼운 겉옷을 들추고 그속에 감춰진 한 인간의
내밀스런 영혼을 보여준다.

카메라는 과거와 현재를 흑백과 컬러로 옮겨다니며 "보이지 않는 힘"을
찾아낸다.

반투명유리위에 스테인드글라스를 포개놓은 듯한 이 기법은 닉슨의
삶을 설명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보인다.

표면적인 줄거리는 워터게이트사건으로 시작해 닉슨의 사임으로
끝난다.

닉슨을 그토록 권력지향적이고 편집광적인 인물로 만든 것은 무엇
이었을까.

첫째는 아버지로부처 물려받은 투쟁성이다.

이 집착은 케네디형제에 대한 컴플렉스로 인해 그 강도가 커진다.

"나라가 위기야. 내가 구해야 해".

유신시대의 대통령을 연상시키는 이 대목은 그러나 가장 위험한
함정이다.

위기때마다 백악관 지붕위로 급박하게 흩어지는 구름이 이를 암시한다.

폭풍전야같은 구름의 소용돌이가 멈출때쯤 화면은 닉슨의 또다른 면을
비춘다.

성자인 어머니의 사랑.하지만 그가 그리워한 것은 "군중의 사랑"이다.

권력을 향한 사다리타기와 인간적인 고뇌 사이를 곡예하듯 살다간 그의
삶은 그래서 20세기의 비극이자 우리 삶의 고통스런 거울로 다가온다.

닉슨의 양면성을 뛰어나게 소화해낸 안소니 홉킨스의 표정연기가
압권이다.

( 17일 대한극장 개봉 예정 )

< 고두현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2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