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생이 헝클어진 옷자락들을 얼른 매무시하고 봉두난발이 되어 있는
머리도 매만지며 얼마 동안 앉아 있으니 과연 앵앵이 홍랑의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지난번의 당당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부끄러운 기색을
띠며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들어서는 모습이 가냘프게 보이고
병색이라도 있는 듯이 여겨졌다.

푸른기마저 도는 교교한 하현 달빛을 배경으로 앵앵을 바라보니
저승에서 잠시 다니러 온 혼령인가 싶기도 하였다.

홍랑은 돌아가고 장생과 앵앵만 방에 남았다.

장생이 앵앵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당황스러워하고 있는데
앵앵이 소리 없이 웃옷들을 벗고는 침대에 오르더니 자기 베개를 베고
누웠다.

장생도 얼떨결에 앵앵 옆에 누웠다.

장생이 뭔가 이야기를 하려고 하자 앵앵이 손가락으로 장생의 입을
막으며 어느새 머리를 장생의 가슴에 묻었다.

아무말 없이 안기만 해달라는 몸짓 같았다.

장생은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지만 심호흡을 해가며 앵앵의 옷을 마저
벗기고 사향 향기가 은은히 풍기는 그 부드러운 몸을 더듬었다.

장생이 앵앵의 몸속으로 들어갈 때 앵앵의 두 눈에는 눈물이 흘러
내렸다.

얼마 있으니 가까운 절간에서 범종이 울리고 새벽닭이 울었다.

창에는 달빛이 물러가고 맑은 동살이 비쳐오기 시작했다.

"아씨, 물러갈 시간인데요"

홍랑이 돌아와 문 밖에서 아뢰었다.

앵앵은 다시 눈물을 비치며 조용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장생은 침대에서 내려와 방바닥에 멍하니 한참을 앉아 있었다.

어젯밤 일이 아무래도 꿈만같아 여기저기 둘러보며 앵앵이 다녀간
흔적을 찾아보았다.

앵앵의 몸에서 풍기던 향기가 여전히 방안에서 나고 있었고 앵앵의
얼굴에 발랐던 분가루가 이불 모서리에 묻어 있었다.

앵앵이 떨군 눈물도 요 한구석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무엇보다 앵앵이 베었던 베개가 침대 머리맡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베개가 그대로 놓여 있다는 것은 앵앵이 다시 돌아오겠다는 뜻이 아닌가.

그러나 열흘이 지나도 앵앵으로부터 아무 소식이 없었다.

장생은 앵앵을 찾아가는 것도 지난번 당한 일이 있고 하여 어쩐지
꺼려져 앵앵을 보고 싶은 마음을 달래며 시를 한 수 지었다.

시의 제목은 "회진시"였다.

진실을 만났다는 뜻이었다.

장생에게는 앵앵의 몸 자체가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진실이었던
것이었다.

그 시는 서른 행으로 제법 긴 편에 속하였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여인을 드디어 안아본 감격이 고스란히 그 시에
담겨 있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2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