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대문소재 한유약품의 김영철사장은 지난달말 고려약품에 4백만원
어치의 약품을 납품한뒤 어음을 받고 가슴이 답답했다.

결제기간이 6개월이 넘는 장기어음이어서이다.

결제일은 8월 5일.눈내리는 한 겨울에 납품해 삼복더위때나 대금을 회수할
수 있게 돼 앞으로 자금굴릴 일이 아득했다.

그나마 김사장은 나은 편이다.

군포에 있는 대린상사는 작년 10월5일 현대특수나염에 계면활성제 1천
23만원어치를 납품하고 올 7월5일 만기의 어음을 받았다.

결제기간은 9개월에 이른다.

천안소재 삼한기계는 인천의 유리가공업체에 지난해 자동판유리가공기계를
팔고 1년짜리 어음을 받았다.

물품대금으로 받은 상업어음의 결제기간이 갈수록 장기화돼 중소기업들이
전전긍긍하고 있다.

하도급거래공정화에 관한 법률상에 명기된 2개월이내짜리 어음은 일부
대기업만이 발행, 시중에선 구경조차 힘들다.

대부분은 3~4개월의 장기어음이다.

6개월이 넘는 초장기어음도 비일비재하다.

기협 공제기금창구엔 이같은 장기어음을 들고 할인을 받으려는 기업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장기어음은 은행이나 제2금융권에서도 할인을 기피, 현금화마저 어렵다.

기협이 조사한 어음결제기간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4.4분기중 중소기업이
받은 어음중 60일이내짜린 13.3%에 불과했다.

61일이상 90일이내가 17.4% 91일이상은 무려 69.3%에 달했다.

91일이상 장기어음비율은 94년 4.4분기의 69.7%와 거의 같은 수준이고
93년 4.4분기의 64.6%에 비해선 오히려 4.7%포인트나 늘었다.

정부와 대기업의 결제기간단축 발표에도 불구, 오히려 평균 결제기간은
길어지고 있는 셈이다.

어음기간이 장기화되는데다 부도마저 빈발, 중소기업 사장들은 장기어음을
받으면 밤잠을 못 이루고 있다.

실제 장기어음의 상당수가 부도로 연결돼 업체를 괴롭히고 있다.

이대길디케이박스사장은 "받을 어음가운데 부도나는게 워낙 많아
중소업체들의 상당수가 연쇄부도의 공포에 휘말려 있다"고 말한다.

이동현삼원종합기계상무는 "받을 어음 10장중 평균 2~3장은 부도가 난다"며
"어음이 결제될 때까진 발을 못뻗고 잔다"고 지적했다.

30대 대기업들은 어음결제기간을 점차 줄이고 있으며 현금결제도 확대하고
있다.

이들은 사회적 이목과 공정거래위원회의 칼날등을 의식, 대부분 60일이내
짜리를 발행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8월초 김영삼대통령이 30대그룹총수를 초청,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을 늘려줄 것을 당부한뒤 각그룹은 보름내지 한달가량 결제기간을 단축
했다.

특히 삼성전자는 협력업체의 납품대금을 금액에 관계없이 전액 현금결제
하고 있어 중소업체로부터 박수를 받고 있다.

"문제는 30대이외의 대기업과 중견기업 중소기업들이 발행하는 어음"이라고
기협중앙회 한기윤경제조사부장은 말한다.

상대적으로 공정거래위원회의 감시를 덜받는 틈을 타 3개월이상짜리를
버젓히 발행하며 응당 주게 돼있는 연체이자를 안주는 경우도 빈번하다고
지적한다.

중소하청업체들이 발주자들에게 항의하기가 힘든 약점을 이용하는 것이다.

일부 중견기업들은 대외적으로 장기어음 발행을 숨기기 위해 아예 발행
일자를 기재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상업어음할인을 담당하는 기협 공제2과의 정성모과장은 "할인을 요청한
어음중 30~40%가 발행일자가 없다"며 세금계산서를 감안할때 이들 어음의
대부분은 6개월이상짜리라고 지적했다.

중소업계는 이제 상업어음제도를 대폭 수술할때가 되었다고 입을 모은다.

서정원선광전기사장은 "중견기업들이 법적기한인 2개월이내짜리 어음만
발행토록 감시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어음발행때 물품납품후 1~3개월후에나 어음을 발행, 표면상의 결제기간
에 관계없이 실제결제기간이 길어지는 사례를 막기위해 물품인수후 어음을
즉각 발행토록 해야 하며 발행일자기재도 의무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중소기업연구원의 홍순영박사는 "업체 능력에 맞춰 어음발행한도의 제한과
어음단속법의 강화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현행 어음제도는 장당 발행금액의 한도가 없어 기업의 능력에 벗어나는
과도한 금액을 발행하기 일쑤고 이런 무책임한 발행이 연쇄부도를 낫는다고
지적한다.

또 현행 법규상 어음부도는 형사처벌을 하지 않아 부도를 양산한다며
일시적 부작용이 따르더라도 어음부도때 무거운 처벌을 병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2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