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를 하루 앞둔 17일 오전 10시 충남 천안시 "천안 개방교도소".

21년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교도소 문을
나서는 한 죄수의 눈에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크리스마스 이브 분위기가 한창이었던 75년 12월24일, 술에 만취해 변심한
애인 집을 찾아 갔다가, 방에서 자고 있던 가정부를 폭행.

살인해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던 양동수씨(46).

그러나 그는 대통령까지 감동시킨 어머니의 지성으로 무기로 감형된 뒤
18년이 지난 이날 마침내 밝은 세상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게 됐다.

"어무이, 어무이.."

양씨는 북받쳐 오르는 감회를 이기지 못한 채 울먹였다.

양씨가 그토록 애타게 찾는 어머니 김상순씨(92년 87세로 작고)는 11남매의
막내인 양씨가 대구 교도소에서 사형수의 길을 걷게 되자 팔순을 바라보는
노구를 이끌고 고향인 진주를 떠나 교도소 담근처에 1평 남짓한 방을
얻었다.

어머니는 "내 자식이 냉방에 자는데 내가 따슨 방에 잘 수 있겠느냐"며
엄동설한에도 군불 한번 지피지 않고 아들의 업보를 함께 짊어져나갔다.

어머니는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교도소를 향해 큰절을 한 후
교도소에 일착으로 면회신청을 해 놓고 아들의 생사를 확인했다.

또 "아들을 사형수로 키운 에미도 공범"이라며 속죄의 심정으로 매일
아침 교도소 주변을 쓰는 것은 물론 동네 오물 청소, 초상집에 찾아가
염습해주기 등 아들의 죄가 씻겨지는데 도움이 된다면 어떤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기를 2년6개월.

어머니의 정성은 한 스님의 귀에도 들렸다.

후에 "재소자의 대부"로 불리게 된 박삼중 스님은 당시 포교사로 대구
교도소를 드나들고 있었다.

자신을 찾아온 스님에게 어머니는 "내 아들이 형 집행당하믄화장해서
뼈에 밥풀과 꿀을 발라 까막까치 밥으로 뿌릴끼요. 그카믄 짐승이 뼈를
묵게 되니 죄도 씻어 질끼고. 나도 공범 됐으니 따라 죽어서 똑같이
할끼라"고 말한다.

스님은 그길로 각계인사 5천명의 서명을 받아 "양씨에 대한 형을 집행하면
어머니도 죽게돼 결국 두 사람을 죽이는 꼴이 되니 선처해 달라"는 내용의
탄원서를 들고 당시 이선중 법무부장관(현변호사)을 찾아간다.

팔순 노모를 둔 이장관은 눈물을 훔쳤고 박정희 대통령의 마음도 흔들려
78년 성탄특사에서 양씨의 형량은 무기로 감형되기에 이른다.

아들의 형장행을 간신히 돌려놓게 된 어머니는 고향인 진주로 돌아가지만
그의 자식사랑은 예서 멈추지 않았다.

대구에서 마산으로 또 대전으로 아들이갇힌 곳이면 어디든 면회를 다녔다.

그러던 어머니는 17년간의 "창살 없는감옥"생활끝에 92년 4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들이 즐겨쓰던 선글래스와운전면허증, 주민등록증을 손에 꼭 쥔 채 "내
죽거든 뼈에 꿀을 발라 까막까치 밥으로 뿌려달라"는 말과 함께.

이제 양씨는 "대단한" 인간이 되었다.

교도소에서 서예에 취미를 붙여 서예대전에서 두차례 입선하는 실력을
쌓았으며 남들은 2년걸려서도 따기 힘들다는 법사자격증을 통신교육만으로
10개월에 따냈다.

어머니의 유언을 쫓아 법문에 들어선 양씨는 "법사로서 속죄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했다.

양씨는 바깥세상의 첫 하루를 바쁘게 보냈다.

출소하자 마자 서울로 올라와 국립묘지의 고박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한 뒤
이선중 변호사에게 인사를 드렸다.

또 박스님을 통해 알게된 시인 구상씨와 박대통령의 차녀 근영씨를 찾아가
감사의 뜻을 전했다.

양씨는 오늘(18일)아침에는 대구교도소 정문앞에 있는 "움막 같았던
어머니의 방"을 다녀온 뒤 부산 자비사에 모셔져 있는 어머니의 영정과
위패앞에 고개를 숙일 예정이다.

폐가 좋지 않은 양씨는 고향 진주에서 보름가량 요양을 한 뒤 "법사의
길"을 가려한다.

그의 석방이 결정되던 지난해 말 양씨의 꿈 얘기 하나는 진정 우리의
콧등을 시리게 한다.

아침에 갑작스레 교도소장으로부터 석방건의서가 법무부에 상신됐다는
얘기를 들은 양씨는 온몸이 사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전날 밤꿈에 나타나신 어머니께서 "니그 서류가 다 됐다. 나는 이제
갈란다. 잘 있그래이"하셨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저승에서도 아들이 머무는 교도소를 떠돌고계셨던 모양이다.

< 이계주/윤성민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2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