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운이 희봉에게 그렇게 비싼 향료들을 선물한 것은, 물론 희봉이
좋아서 그냥 준 것은 아니고 기회를 봐서 가련에게든 희봉에게든
일자리를 부탁하려고 그런 것이었다.

희봉도 가운의 속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가운이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데 이쪽에서 먼저 꺼낼 필요가 없다고 여겨졌다.

때를 봐서 가련에게 이야기해서 가운으로 하여금 대관원에 나무 심는
일을 감독하도록 하면 될 것이었다.

그런데 희봉이 궁금한 것은 가운의 집이 가난한데 어떻게 그런 향료를
구할 수 있었느냐 하는 점이었다.

가운은 다음날,다시 놀러오라는 보옥의 말이 생각나 점심을 먹은
후 영국부로 곧장 건너갔다.

가운은 보옥이 대부인에게로 놀러 와 있는 게 아닌가 하고 대부인의
거처로 가보았다.

그러나 배명과 서약 같은 하인아이들만 기하재라는 서재에서 장기를
두고 놀고 있을 뿐 보옥은 보이지 않았다.

"보옥 도련님은 아직 안 나오셨나?"

가운이 배명에게 물으며 서재를 둘러보았다.

"나오실 때가 되었는데 아직 나오지 않았어요.

제가 찾아볼까요?"

그러면서 배명이 서약을 데리고 서재를 나가는 바람에 가운 혼자 남게
되었다.

가운이 심심하여 서재 벽에 걸려 있는 서화들을 둘러보고 있는데,
갑자기 문밖에서, "오빠!"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났다.

누가 나를 오빠라고 부르나 하고 가운이 문을 열어보니 전혀 낯선
처녀가 거기 서 있다가 놀란 듯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는 달아나버렸다.

그 순간, 말쑥하고 곱상한 처녀의 얼굴이 가운의 뇌리에 콱 박혀버렸다.

아마 그 처녀는 배명이 서재에 있는 줄 알고 오빠라고 불렀을 것이었다.

얼마 후 배명이 돌아와서 보옥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다고 하였다.

가운은 다음 기회에 놀러오리라 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저녁, 보옥이 바깥을 싸돌아다니다가 자기 방으로 오니 시녀들이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차를 마시고 싶어 소리내어 시녀들을 불러보았지만 어디서도 대답이
없었다.

보옥은 할 수 없이 자기가 직접 부엌으로 내려가 찻물 주전자를 집어들고
찻잔에 따르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그만 뜨거운 찻물을 손등에 흘리고 말았다.

"아이, 뜨거워"

보옥이 소리를 지르며 주전자를 떨어뜨리려고 할 찰나, 누가 등 뒤에서
달려들어 주전자를 대신 잡아주었다.

처음 보는 시녀였다.

"넌 누구야?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거야? 깜짝 놀랐네"

(한국경제신문 1996년 2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