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 작고한 K씨가 70년대 중반 내무장관 재직중 가로늦은 해외 순방에서
귀국, TV에 나와 신이 나서 한 말은 오래 잊혀지질 않는다.

"미국엘 가보니 교통신호에 노란불 좌회전이라곤 없더라. 우리도 이제
황색신호 좌회전을 없애겠다"

그 뒤 황색등은 주의신호로 역할이 바뀌었고 필요한 곳에 한해서만 청색
화살표로 좌회전을 허용해 온다.

온갖 외국 문물의 도입은 불가피했다.

게다가 5.16주체였던 K씨의 감수성 강한 인품은 따지자면 오히려 매력의
포인트였지 사후 밉상은 더욱 아니었다.

문제는 밑바탕에 깔려 있는 그의 인식착오다.

나아가 그 유사한 오류가 오늘까지도 여기저기 구석구석에 깔려 사회발전의
애로로 작용함에 심각성이 있다고 본다.

사실을 보자.

미국 신호체계에 정말 좌회전이 없는가.

오히려 그 반대여서 청신호는 원칙적으로 직진 우회전에다 좌회전까지를
포함한다.

K씨에 인각된 화살표 좌회전신호는 임의 좌회전이 위험한 지점에서 안전을
높이기 위한 추가적 배려일 따름이다.

근래 국내에서 예외로 허용되는 "비보호 좌회전"이 미국선 이미 예외아닌
원칙이었던 것이다.

그럼 이런 인식착오가 말썽없이 여태까지 수용되어 오는 것은 어찌된
까닭인가.

무엇보다 그 신호체계 변경이 가져온 실용적 성과가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오류는 사람들의 의식속에 잠재해 있다.

고도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는 지나치기 쉬운 사각과 맹점을 무의식중에
안고 있다.

그리고 이를 솔직히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발전은 없다.

그것은 한마디로 원초적 오류다.

원점으로 돌아가자.

요약해서 청-황-적의 교통신호를 창설적 권리부여로 볼것인가, 아니면
권리에 대한 불가피한 제한으로 볼 것인가에서 가지가 갈린다.

그 하나는 앞으로 가든, 방향을 바꾸든, 모든 행동의 자유(권리)는 운전자
가 생래적으로 가진 것이지만 여러 사람의 자유간의 충돌로 질서가 파괴됨을
막기 위해 신호로서 통행권의 일부를 부득이 제한한다는 사고.

그 둘은 청신호가 켜짐으로써 비로소 운전자의 직진 또는 회전할 권리가
발생한다는 사고다.

간단해 보이지만 양자중 어떤 쪽을 택하느냐는 철학의 문제로서 세계관
자체를 좌우한다.

강자의 사슬에서 약자를 풀어낸 긴 흐름을 인류사라고 파악한다면 이성시대
이전까지 피지배자의 권리는 지배자의 은전이 있음으로 해서 비로소 부여
되었던 것이며, 부여된 권리의 회수 또한 같은 시각으로 인식되었다.

이 사조가 어쩌다 새 패러다임을 맞았는가.

그 분수령은 르네상스, 종교개혁, 존 로크등 자연법 사상가의 지속적
기여다.

그런 제근대화과정을 거르지 않고 밟아온 법체계에선 아무리 국가권력에
근원한 교통규칙이라도 원초적 자유권인 시민의 도로통행 권리를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데 인식을 같이 한다.

반대로 천부적 권리에 대한 인식이 깊이 스미지 않은 법체계에선 도로통행
의 자유권이 타고난 것인지, 국가가 부여해서 발생되는 권리인지 혼동할뿐
아니라 구태여 분간하려 조차 들지 않는다.

과장이 아니다.

서울 네거리 신호대기중에 교통경찰이 앞에 서있다고 하자.

푸른 신호등이 분명 켜져도 경관의 완수신호, 최소한 눈치라도 보기전에
머뭇거림 없이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나갈 운전자가 얼마나 될까.

그렇지 못한게 실은 이 나라의 보통 사람이다.

벌써 군사정권 아래서도 규제완화란 말을 귀가 닳을만큼 들었었다.

문민정권 3년 아래서야 오죽 귀가 따가웠는가.

그럼에도 "규제 풀렸소이다"하는 시원한 화답은 요원하다.

규제완화가 경쟁력 제고의 첩경이니 어쩌니, 필요성을 되 물음은 진부하다.

경주에서 두 팔을 마음껏 저으며 달리는 선수와 팔 하나를 허리에 감고
뛰는 선수중 누가 이길까를 묻는 것이나 진배없는 우문이다.

더구나 93년 내건 국제화, 94년말 더 높게 고쳐 세운 세계화 기치야 말로
행정규제의 세계 수준적 완화를 가리킴에 다름아닐 진대, 지난해 상의
조사에서 기업의 68%가 행정개혁입네 해도 아직 달라진게 없다 함은 무엇을
뜻하는가.

사회 현상을 논함에 있어 원인과 대책을 지나치게 단순화함에는 반대지만,
규제완화가 만성적으로 지연되는 근본 원인을 말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것은 자연법적 사고를 결여한 채로 뿌리깊은 왕권 신수적인 관료권한
절대의식과 공직자의 애국심 독점 욕구로 줄일수 있다.

하긴 이런 표현도 조심을 하느라고 한 편이다.

한발짝 나아가면 그 애국심의 독점욕은 장사꾼이란 사리사욕만 가득해서
공무원이 한시라도 한눈 팔면 나라가 위태로워 진다는 노파심을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마저 파고들면 그 노파심 맨 속엔 부처 이기주의, 떡고물 욕심까지
또아리를 틀고 있음에 적이 놀란다.

선거는 무엇인가.

실은 정당이나 정치인들이 자신의 세계관 국가관 공직관은 이렇소이다 -
내걸고, 유권자는 그 다양한 후보중 마음에 드는 하나를 선택하는 행사다.

한데 선거 돼가는 꼴은 언제 봐도 그 반대 방향이니 걱정이다.

그래서 바라는 건 이제나 저제나 유권자들이 냉정해져 흙에서 옥을 가려
내는 일인데, 변함없이 봉투 바라고, 동향 동성 동학 사돈팔촌 따져 한몫
보려드니 야단이다.

이래 가지곤 백년하청이다.

이번부터라도 한단계씩 한표의 매운 맛을 봬나가야 할성 싶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3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