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대 36".

지난해 10월 A전자 여사원회는 유니폼 착용 여부를 놓고 투표를 벌였다.

투표 결과는 의외였다.

유니폼 착용에 찬성한 이가 전체 여사원의 53%를 차지한 것.

회사측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곧 총무부장 명의로 사내 공고문을 붙였다.

"여사원들의 유니폼 착용은 부서장 재량에 맡긴다"고.

36%의 반대의견을 고려해 나온 조치였다.

그러나 4개월이 지난 지금 A전자에서 사복이 허용되는 부서는 한 곳도
없다.

유니폼 문제의 복잡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다.

고졸과 대졸 여직원간의 입장 차이, 동료 남자사원과의 갈등, 부서장과의
인간 관계, 유니폼 문제는 이 모든 것들을 함축하고 있다.

"17%"의 갭에는 유니폼 그 이상이 있다는 얘기다.

"유니폼을 입는게 관례이니까 따를 뿐이다. 무얼 입고 나와야 할지 고민
하지 않아 오히려 좋다"(경리부 C씨)

"여사원들이 오히려 유니폼 착용을 원했다. 투표 결과도 그렇지 않은가"
(수출지원팀 K차장)

"유니폼을 허용하는 부서장은 위로부터 부하직원 관리능력이 떨어진다는
소릴 들을게 뻔하다. 자율적인 의사결정은 애당초 불가능하다"(문서수발팀
P씨)

"유니폼은 개성을 무시하는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개인 의사에만
맡겨진다면 유니폼 입기를 원하는 여사원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보제작팀 O씨)

매년 전문대이상 대학을 졸업하는 여성 예비취업자수는 줄잡아 10만명.

40대 1의 경쟁률(94년 기준 50대 그룹 여대생 취업자 2,741명.노동부)을
뚫고 대기업에 취업한 여성들이 입사후 처음으로 맞닥뜨리는게 "유니폼"
문제라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그런 점에서 국내 기업의 여사원들은 여전히 "사무실의 꽃"이다.

굳이 중소기업을 들먹거리지 않아도 된다.

세계화 정보화를 외치는 "글로벌 기업"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오히려 조직내 분위기나 문화는 더 봉건적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같은 기업문화가 단순히 문화의 낙후성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기업의 경쟁력과 직결된다.

"21세기 기업에서 소프트한 감성과 상상력은 가장 중요한 자산이자 경영
전략"(톰 피터스.맥킨지 경영컨설턴트)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억제하는" 유니폼은 우리 기업의 세계화수준을
드러낸다.

"21세기 조직"에 "19세기 문화"를 덧칠한 모습이다.

최근 여사원 유니폼을 폐지한 S그룹은 무려 6개월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당시 사복착용을 앞장서 주장했던 인사팀 간부는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오늘은 무엇을 입고 나갈까를 고민하는게 자율과
창의의 기본이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다. 자신을 연출할 수 있는 직장인
만이 업무를 능동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여성민우회 조사에 따르면 국내 30대그룹 중에서 사복이 허용되는 기업은
단 4곳.

그나마 고졸여사원에 대해선 한 곳을 제외하곤 모두 유니폼착용이 의무화돼
있다.

"제복은 개성보다 조직을 강조하는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제로 군복
교복 유니폼 등 제복을 착용했을때 인간은 상대적으로 수동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차재호 서울대 심리학과교수)는 조사도 있다.

결국 여성에게 유니폼 착용을 강요하는 기업문화는 여전히 여성을 "보조
인력"이나 "사무실의 꽃" 정도로 생각하는 인식의 후진성을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기업내에서 여성의 지위가 향상됐다는 말은 "예전에 비해 그렇다"는 것에
불과하다.

국내 기업은 여전히 남성위주의 문화 업무 조직이 지배하고 있다.

여성인력에 대한 기업의 접근방식은 단적인 예다.

여사원들은 능력과 상관없이 기획 총무 지원부서 등 여성에게 적합하다고
"인정되는" 일들만 주어진다.

관리하기 곤란하다는 이유로 대졸여사원은 "노 생큐"라는 간부사원들이
여전히 많다.

차 심부름이나 복사 심부름등 직무와 상관없는 "잡무"에 시달리는 고급
여성인력들도 부지기수다.

기업의 규모가 작을수록, 여성채용이 제도화돼 있지 않은 기업일수록
이같은 차별의 정도는 심해진다.

"대기업조직내에서 고급 여성인력이 처한 상황은 상당히 복합적이다. 우선
제도적인 면에선 중소기업 여사원이나 생산직 근로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등하다. 그러나 관리자의 의식이나 조직 문화측면에선 오히려 훨씬
봉건적인 상황을 경험한다"(한국여성개발원 김태홍 책임연구원.고용팀)

결국 "상대적으로 선진적인 제도, 절대적으로 후진적인 문화"야말로
대기업조직내 여성인력들이 처한 현재의 상황을 압축하고 있다.

이는 가정내에서 여성이 처한 지위와도 연결된다.

결혼과 가사, 그리고 육아에 따른 모든 잡다한 일은 대부분 여성들에게
짐지워진다.

그러다보니 일하는 여성에 대한 편견은 더욱 굳어진다.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면 "바늘로 찔러도 피한방울 안나올 여자"라는
시기섞인 비아냥이 돌아온다.

그렇다고 실수라도 하면 "여자는 어쩔 수 없어"라는 핀잔을 듣는다.

남성은 "능력 있다" 또는 "능력 없다"는 단일 평가기준을 적용받는데 반해
업무를 완벽하게 처리할 수도 허술하게 처리할 수도 없는 어정쩡한 지위,
선진 제도에 못미치는 남성 동료나 간부사원들의 의식, "사무실의 꽃"과
"전문화된 워킹우먼" 사이에서 방황하는 여사원 자신의 직업관.

이 모든 것들이 21세기 "소프트" 사회를 5년 앞둔 지금 한국의 고급 여성
인력들이 처한 실제 상황이다.

마치 사복위에 유니폼을 엉거주춤하게 덧입은 꼴이라고나 할까.

미국 UCLA대학의 로저스교수(사회학)는 사회변화를 물리학에서 유래한
크리티컬 매스(critical mass.임계질량)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새로운 관습 상품 종교체제 등이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데는
특정 한계점이 있고 사회변화는 바로 그 시점에서 일어난다"는 주장과
함께.

여성인력을 여자로서가 아니라 "일꾼"으로 받아들이는 인식은 크리티컬
매스 상태에 도달했는가.

"17%"의 갭 안에는 이 의문에 대한 해답도 들어있을듯 싶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3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