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씨는 마도파의 말대로 그 모든 일을 비밀로 하기 위해 자기가 직접
사람 모양의 인형들과 귀신 모양의 인형들을 보옥과 희봉의 침대 밑에
넣기로 하였다.

희봉의 방에는 마치 도둑처럼 며칠 동안 기회를 엿보다가 아무도 없을때
들어가 그 인형들을 침대 밑에 넣는데 성공하였고, 보옥의 경우는 얼굴에
화상을 입은 이후로는 거의 바깥 출입을 하지 않았으므로 조씨가 병문안을
가서 위로해주는 척하며 보옥이 한눈을 팔때 슬쩍 그 인형들을 품에서
꺼내어 침대 밑에 넣어두었다.

조씨가 보옥의 침대 밑에 인형들을 넣어둔 그 다음날이었다.

대옥은 아침 식사를 마친후 책들을 뒤적거려보다가 별로 재미가 없어
덮어놓고 자견과 설안을 데리고 바느질을 해보았다.

그런데 바느질도 따분하기만 하였다.

바느질감을 자견과 설안에게 맡겨놓고 대옥은 멍하니 문설주에 기대서서
뜨락을 내다보았다.

고요하기 그지 없는 뜨락이었다.

주변은 봄 기운이 완연하였지만 그 적막으로 인하여 왠지 쓸쓸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대옥은 문득 마음이 휑하니 뚫리는 기분을 느끼며 인생이 참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저 세상으로 가신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진가경, 진가경의 동생 진종, 진종의 아버지 진업 들은 아예 일가족이
저승으로 가 있지 않은가.

봄이 지나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지나가면 가을이 오듯이 그렇게
인생들도 덧없이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한 인생이 지나가고 난 자리는 저렇게 적막한 뜨락과 같지 않은가.

그런데 그 적막한 뜨락에도 생명의 움틈은 계속되고 있었다.

"어머, 저 죽순 좀 봐"

뜨락의 돌층계 밑에 연두빛 죽순이 빼주룩이 솟아나 있었다.

그 죽순의 연두빛에 이끌리듯 대옥은 자기도 모르게 문지방을 넘어
뜨락으로 나왔다.

대옥은 돌층계로 다가가 허리를 구부려 죽순을 들여다보고 또 손으로
조심스럽게 만져보기도 하였다.

손바닥에 죽순의 연두빛이 금방이라도 묻어날 것 같았다.

대옥이 가만히 한숨을 쉬며 허리를 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쪽 화단에 꽃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그 너머 버들도 그늘을 드리우며
하늘거리고 있었다.

들리는 것은 개울물 소리와 새소리 뿐이었다.

그래도 뜨락으로 나오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대옥의 발걸음은 어느새 보옥이 기거하고 있는 이홍원으로 향하고 있다.

보옥은 얼굴에 화상을 입은 이후로는 방에만 처박혀 있으므로 대옥이

거의 날마다 찾아가서 말동무가 되어주곤 하였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3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