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가 죽을 때에는 그 울음소리가 구슬퍼지고 사람이 죽을 때에는
그 말이 착해진다" (조지장사 기명야애 인지장사 기언야선)는 말이
있다.

로나라의 맹경자가 문병갔을 때 죽음이 임박한 증자가 그에게 남긴
최후의 말이다.

이를테면 유언이었는데 범인의 유언과는 달리 죽음을 슬퍼하는
구석이나 잔소리 같은 당부는 전혀 찾아볼수 없다.

군자답게 오로지 평생을 공부하며 깨달은 바를 진솔하게 전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증자같은 사람들만 살았던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애의 가장 불행한 기록이며 가장 효력있는 기록인
유언장을 쓰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려 들었다.

저명한 영국의 철학자였던 제레미 벤담은 죽은 뒤에도 자신이 중역회의를
주재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여 런던병원에 유산을 넘겨주었다.

그래서 옷을 입힌 벤담의 유골은 중역회의실의 유리상자속에 92년
동안이나 계속 앉아 있었다고 한다.

이 세상의 부나 권력이 끝내 이겨내지 못하는 한계가 죽음이다.

그리고 죽음에 직면한 인간은 말로나 글로 무엇이든 남기려 든다.

영국의 풍자소설 작가인 새뮤얼 버틀러가 마지막 남긴 말은 "수표장은
챙겼는가"였다.

시인 바이런은 말라리아에 걸려 죽어가면서 "자, 이제부터 잠이나 좀
자볼까"라는 여유를 보였다.

물리학자 퀴리부인은 방사능에 오염돼 의사가 진통제 주사를 놓으려하자
"필요없어요"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

풍자작가 조나단 스위프트는 죽어가면서 "구멍속에서 독살된 쥐처럼
나는 죽는다.

나는 나다.

나는 나다"를 되뇌었다.

미국의 유랑시인 베이첼 린지는 피로와 환멸을 느낀 나머지 "저 친구들은
나를 해치려고 했지.

그래서 내쪽에서 먼저 해치우는 것이다"라며 음독자살했다.

이처럼 인간이 최후로 남긴 말들은 꼭 선하다고는 할수 없다 해도
거짓없이 솔직 담백한 심경의 표현이었다.

최근 서울에서 일어난 "채권자 토막살인사건"의 수사결과 범인이
채무자 부부인 것으로 밝혀졌다.

부인이 남편의 범행임을 털어놓았지만 이미 자살한 남편의 범행을
부인하는 유서가 문제가 되고 있다고 한다.

그가 어떤 이유에서든 "거짓유서"까지 남겼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요즘
세태라지만 "사람이 죽을 때는 그 말이 착해진다"는 증자의 말도 이젠
믿을수 없게 된 것일까.

(한국경제신문 1996년 3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