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우 <패션디자이너 오리지날리 대표>

바쁜 일과로 인해 많은 시간을 할애해 책을 읽지는 못한다.

그래도 한권의 책은 사막의 뜨거운 태양아래 허덕이던 나그네의 목을
축이는 오아시스같이 새로운 활력소가 되어준다.

얼마전 차안에서 읽은 고은에세이집 "얼마나 나는 들에서 들로
헤매었던가"가운데 "어떤 할머니의 새벽 울음소리"는 많은 것을 생각케
했다.

"필자는 건강문제로 초겨울이었지만 새벽산책을 앞산으로 다녔습니다.

하루는 첫눈답지 않게 함박눈이 내리는 산책길에서 앞산너머 골짜기로부터
처량한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무슨 사연인지 궁금하여 발길을 골짜기쪽으로 향하다 눈밭에 쭈그리고
앉아 우는 예순 넘은 할머니를 만나 사연을 들었습니다.

사연인즉, 어젯밤이 할머니남편의 제삿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집 가정부로 일하고 있는 할머니는 제사는 고사하고 찬물
한그릇 떠놓지 못하고 깊은 밤중까지 손님 시중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잠깐 눈붙이고 그집 아이에게 새벽밥 지어주고 나와 눈밭에서
울음으로 제사를 지낸 것입니다.

그런 사연을 들은 필자는 건강악화 따위가 사치라 여겨져 그날이후
다시는 새벽산책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짧은 글이지만 눈오는 새벽을 담은 한폭의 동양화를 떠올리게 하는
글이다.

이 동양화가 주는 메시지는 간단하지만 우리가 너무 쉽게 잊고사는
것을 말해준다.

할머니의 남편에 대한 사랑, 필자의 할머니에 대한 인간애 등.

우리는 바쁘게 살아온만큼 많은 발전을 이룩했지만 그럴수록 많은 것을
잃고 있는 것같다.

이런 말조차 점점 퇴색돼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직도 따뜻한 손길과 온정을 필요로하는 많은 이웃들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는다면 보다 나은 사회가 될것이다.

후손들에게서도 인정 넘치는 민족이라는 말이 나올수 있도록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3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