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색은 용서하는 색이야.

밤마다 500나한을 빚는 거란다.

아버지를 용서해라. 그게 카루나야"

한 비구니가 20여년만에 만난 아들을 향해 독경처럼 들려주는 얘기다.

이일목 감독의 "카루나"는 3대에 걸친 청자도공의 가족사를 통해
화해와 용서의 정신을 그린 영화.

분단과 이데올로기 대립, 전쟁과 갈등의 한국 현대사가 배면에 깔려
있다.

영화는 43년 전북 부안의 고려도공 후손 양천수 일가의 비극에서
시작해 분단 현실의 민족적 자화상까지를 담아낸다.

"카루나"란 용서를 뜻하는 인도어.

도공의 둘째 아들 종길 (조재현)은 지주집에 빚을 진 분님 (옥소리)네
가족을 위해 청자굽는 가마에서 사기그릇을 굽다가 아버지에게 들킨다.

사기그릇은 박살이 나고 분님마저 지주의 곱추 아들과 강제 결혼하자
종길은 마을을 등진뒤 전쟁통에 인민군이 돼 돌아온다.

그는 지주를 총살하고 분님과 재회, 못다한 사랑을 나누다 곧 국군
장교인 형과 총부리를 겨누는 상황에 맞닥뜨린다.

형제의 상잔을 보지 않겠다며 스스로 눈을 찌른 아버지 앞에서 둘은
미완의 화해에 이르지만 이데올로기의 틈바구니에서 각각 처형당하고
분님도 종길의 아이인 진형을 맡긴채 마을을 떠난다.

20여년 후.

출생의 비밀을 안 진형 (김정훈)은 비구니가 된 어머니를 만나 반복되는
비극을 녹이기 위해 청자빛의 재현에 몰두, 비색 500나한상을 빚고
환원염속으로 산화한다.

다소 낡은 기법과 지나친 눈물, 주제의식의 과잉노출 등이 아쉬움을
남기지만 고전적인 영화의 미덕을 되살리려는 감독의 정성은 색다른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3,000평의 도예촌 세트와 국내 최초의 몽골로케, 옥소리 삭발,
불교계의 관심 등으로 숱한 화제를 모았던 이 작품은 개봉을 하루
앞둔 15일 현재 전국에서 30만명의 예약 실적을 기록, 흥행을 예고하고
있어 주목된다.

( 16일 스카라 화양 대지 연흥 , 23일 힐탑 개봉 )

< 고두현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3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