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 선거 전날 강의실 복도에서 앤절라와 우연히 마주쳤다. 앤절라는 지난 학기에 내 강의를 들었던 학생인데 환경, 여성, 낙태 등 진보적 이슈에 열정적인 민주당 지지자다. “앤절라! 넌 해리스 후보를 지지하겠구나?”라고 물었더니 앤절라는 고개를 저으며 “해리스는 말을 계속 바꿔서 신뢰가 안 가요. 차라리 트럼프가 나아요”라고 답했다. 미국 시민권자는 한국에 있더라도 사전 우편투표를 할 수 있다. 앤절라는 열성적인 민주당 지지자여서 당연히 한국에서 우편으로 사전투표를 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이번에는 기권을 선택했다.상황이 이렇다 보니 개표 결과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 후보가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후보를 크게 이겼다. 줄리아 로버츠, 비욘세, 테일러 스위프트 같은 스타 연예인들이 대거 나서서 해리스를 지원했으나 소용없었다. 선거에서 제일 중요한 건 무엇보다 경제다. 미국은 4년 전보다 물가가 엄청나게 올랐다.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인 흑인들도 높은 인플레이션 때문에 생활비 부담으로 살기가 힘들어지자 해리스에서 트럼프로 지지율이 10%나 빠져나갔다.미국 유권자들은 이번 선거에서 경제 다음으로 중요한 이슈가 이민자 정책이라고 답했다. 민주당을 지지하는 저소득층에서도 민주당 정부가 불법이민자에게 무료 휴대폰과 주택을 제공하는 것에 화가 많이 났다고 한다. 민주당 정부의 느슨한 국경정책으로 많은 혜택을 누리던 히스패닉(남미계) 유권자들조차 이젠 더 이상 불법이민자를 받지 말자며 트럼프 쪽으로 지지를 옮기기 시작했다. 이번 선거에서 해리스를 지지한 히스패닉 유권자는 4년 전 조 바이든 때보다 약 15%나 줄었다.해리스가
“저는 대부분의 삶을 캘리포니아에서 보내며 ‘당연히’ 민주당을 찍어왔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아닙니다.”미국 대선일인 지난 5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의 한 투표소 앞에서 만난 30대 아시아계 남성 유권자는 “다음달 태어나는 아이가 학교에서 ‘젠더는 두 개가 아니라 여러 개’라는 식의 교육을 받게 할 수는 없다”며 이같이 말했다. 과거 로스앤젤레스(LA) 도심 한복판에서 괴한의 총격에 다리를 다친 적도 있다고 밝힌 그는 “민주당이 장악한 캘리포니아에서는 나같이 무고한 시민이 마약에 취한 범죄자들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위협받는 게 일상이 됐다”며 울분을 토했다. 민주당에 대한 심판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이번 대선에서 기록한 캘리포니아주 득표율은 39%다. 이전에 출마한 2016년(32%)과 2020년(34%) 대선 때보다 득표율을 크게 끌어올린 건 물론, 2004년 대선 이후 20년 만에 공화당 후보의 최고 득표율을 경신했다. 캘리포니아의 전체 58개 카운티 중 트럼프 당선인이 승리한 카운티는 2020년 23개에 불과했지만, 올해는 절반이 넘는 31개다.현지 밑바닥에서 느껴지는 이번 대선 결과는 ‘트럼프의 승리’보다는 ‘민주당에 대한 심판’에 가깝다. 트럼프에게 표를 던진 유권자는 트럼프가 좋아서라기보다 주정부·주의회는 물론 연방정부와 캘리포니아에 할당된 연방 상원의원까지 독식한 민주당에 대한 분노로 투표장을 찾았다. 공립학교에서 의무화된 성소수자 관련 교육과 경찰력의 강화를 인권 탄압과 소수 인종에 대한 차별로 결부시키는 과도한 ‘PC(정치적 올바름) 주의’ 정책이 자신들의 삶을 위협한다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는 또다시 경제 이슈가 승패를 갈랐다. 인플레이션에 지친 유권자들은 최근 경제지표 추이보다 줄어든 실질소득을 보전할 희망을 준 후보를 택했다. 도널드 트럼프 후보는 경제 공약으로 감세·관세·이민 제한·규제 혁파를 명료하게 내걸었다. 일부 논리적 모순에도 이 전략은 통했다. 한국은 이 중에서 관세는 물론 규제 개혁에 주목해야 한다. 혁신적 기업가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정부효율성위원회를 이끌 예정이어서 더욱 그렇다.머스크는 테슬라 외에 스페이스X를 포함해 6개 기업을 이끌며 X(옛 트위터)의 개인정보보호, 자율주행차의 안전성, 우주선 로켓 및 저궤도 진입 제한 등에서 정부 규제와 각종 조사를 받으며 과도한 관료주의를 비판해온 인물이다. 연방정부의 지출 삭감·규제 철폐를 기획할 정부효율성위원회 신설과 머스크의 위원장 내정이 갖는 의미는 ‘작은 정부’(민간의 자율)와 ‘생산성’(혁신) 두 개념으로 요약된다.첫째, ‘시장 실패’와 ‘정부 실패’는 경제정책의 영원한 논쟁 주제다. 민간에 지나친 자율을 허용했을 때의 부작용은 1929년 대공황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드러났고, 정부의 지나친 경제 간섭의 위험은 1970년대 선진국 불황, 1980년대 중남미 경제 추락, 1990년대 소련 등 사회주의권 붕괴로 나타났다. 각국의 경제정책도 대공황 이후 ‘큰 정부’와 ‘작은 정부’가 번갈아 시도되다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팬데믹을 거치며 다시 정부 주도의 복지·산업정책(큰 정부)이 등장했다.미국도 조 바이든 행정부 들어 에너지부, 환경보호국, 주택도시개발부 등 주요 부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