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성과 포화는 멎었지만 보스니아의 하늘은 여전히 잔뜩 찌푸려 있다.
거리에 나다니는 보스니아 국민들의 얼굴도 하늘만큼이나 어둡다.
3년7개월동안의 내전이 남긴 잿더미를 수습할 길이 아득하기 때문이다.
한때 "동유럽의 파리"로 불리던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에는 도처에
전쟁의 상처로 얼룩져 있지만 복구의 손길은 더디기만 한 상황이다.
국제기구와서방국들은 지난해 11월 체결된 전쟁당사자간 데이턴협정에
따라 전후 복구사업지원에 적극 나서고 있으나 구체적인 시행과정에서
보스니아측과 큰 시각차이를 보이고 있다.
서방국들의 지원규모가 턱없이 부족할뿐만 아니라 지원우선순위를 결정하는
데서도 대상지역의 고유사정이 무시되고 있다는게 구유고분쟁 3당사국들의
시각이다.
현재 보스니아의 재건사업에는 세계은행의 지원금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세계은행은 지난 2월말 회원국 공동부담의 조건으로 1억5천만달러의
보스니아지원 신탁기금을 마련했다.
이 가운데 식량용 농산물수입과 빈민구호자금, 전력및 수송설비 복구사업
등의 용도로 이미 4천5백만달러를 긴급 수혈했다.
이어 지난 13일 세계은행 이사회는 앞으로 4년동안 보스니아 재건사업에
4억5천만달러의 차관을 제공키로 결정했다.
또 구유고연방의 부채 전액을 보스니아에 떠안기는 대신 30년 분할상환으로
채무이행조건을 완화시켜 줬다.
세계은행은 그러나 이 정도 지원금은 조족지혈에 불과하기 때문에 서방
원조국들의 보다 적극적인 참여가 시급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제임스 울펜손 세계은행총재는 "보스니아정부와 유엔이 공동작성한 재건
계획서를 살펴본 결과 최소복구비용만 앞으로 3~4년동안 51억달러정도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라면서 보스니아가 "밑빠진 독"일수 있다고 우려
했다.
보스니아 정부가 추정하는 재건비용은 1백20억달러를 넘어선다.
보스니아는 동서를 잇는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한때 동유럽에서 가장
활력있는 지역으로 꼽혔었다.
그러나 유고연방이 무너지면서 시작된 세르비야계와 회교세력간의 내전은
참담한 결과를 초래했다.
88년 1천9백달러선이던 1인당국민소득이 500달러 아래로 떨어졌고 올 2월
산업생산액 추정치는 전쟁이전의 6%선에 불과한 실정이다.
산업활동인구는 80% 가량이나 줄었다.
이 80%의 인구가 산업현장으로 당장에 되돌아오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대부분의 산업설비가 폭격을 얻어맞은 탓이다.
결국 황폐화된 보스니아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자력갱생의 기반을
갖출 때까지 서방의 무상지원이나 투자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데이턴협정이 체결될 당시에는 큰 소리로 원조계획을 밝혔던 미국
이나 유럽국가들은 막상 시행과정에 들어서자 발뺌할 명분을 찾는데 급급한
모습이다.
미국은 당초 약속했던 20억달러의 지원금중 보스니아 평화이행군 파병비용
에 약15억달러를 포함시켜 추가로 5억달러 정도만 부담하겠다는 입장이다.
EU회원국이나 회교국들도 요즘 제코가 석자인 마당이어서 겨우 생색을
내는 정도에 머물고 있다.
워런 크리스토퍼 미국무장관도 18일 스위스제네바에서 분쟁 3당사자국
정상들을 만나 평화정착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데이턴협정이 군사적인
면에서는 진전을 보고 있으나 재건사업과 치안문제, 민생고 해결 등에서는
진척이 없다"고 인정했다.
보스니아에는 현재 18만여만명의 퇴역장병들이 길거리에서 나돌고 있다.
돌아갈 일자리가 없어 담배나 초콜릿 행상노릇으로 하루하루 끼니를 이어
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전쟁의 뒤끝이 전쟁못지않게 무섭다"고 이구동성으로 내뱉고 있다.
< 박순빈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3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