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공무원 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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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의 백관들은 관직을 받으면 제일 큰 걱정꺼리가 길사와 흉사,
추울때와 더울때 등 명분이나 계절에 따라 바꿔 입어야 하는 관복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조복 제복 길복 군복등 그 종류만해도 무려 열가지나 됐고 그 가운데
여덟가지가 추울때와 더울때 입는 옷이 달랐다.
게다가 당상관과 당하관등 직품에 따라 다른 옷이 네가지나 됐다고 하니
제대로 구색을 갖추려면 수십벌의 관복이 필요했다.
조정의 대관은 관복이 없으면 공무에 나설수 없었다.
빚을 내서라도 관복을 마련해야 했고 그것도 여의치 못한 사람은 남의
것을 빌려서라도 입어야 했다.
"매양 조회와 제형때가 되면 관복을 구걸하는 사람때문에 다투어 오고
심부름하는 사람이 길에 서로 오가며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면서 다만
얻지 못할까 두려워하니 이것이 과연 무슨 법이겠습니까"
다산 정약용이 관복제도의 폐해를 지적한 "공복의"에 이렇게 적어 놓은
것을 보면 쥐꼬리만한 록을 받아 여러가지 관복을 다 마련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빌려다 썼던 당시의 딱한 정황이 짐작된다.
옷에 대한 다산의 생각은 실학자답게 극히 실용적인 면에 치우쳐 있다.
그는 옷의 용도가 한가지는 몸을 따스하게 하는것이고 다른 한가지는
귀천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따라서 옛날에는 우리 옷이 아주 단순하고 간편했는데 중국과 오랑캐의
복식이 덧붙여져 너저분하고 자질구례한 것에까지 신경을 쓰게 된
것이라면서 길복과 군복만 남기고 모두 없애버려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길복과 군복도 검소하고 간편하게 다시 만들어 비용을 줄여야만 관리도
탐욕하지 않고 백성도 해를 당하지 않게된다는 것이 다산의"공복의"의
결론이다.
당시 이같은 다산의 선구적 생각이 관복의 간소화에 어느정도 영향을
주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양반복식에 따라 바지저고리 위에 두루마기를 입고 그 위에 다시
도포를 입었던 서민복식의 흐름이 반상의 구별없이도 도포가 없어지는 등
평등화되고 간소화된 것은 실학사상의 영향이 컸다.
총무처가 공무원복장을 자율화하기로 하고 전부처에 자율화를 권장키로
했다고 한다.
과거 정권의 획일화된 사고가 "품위를 유지할수 있는 단정한 복장"이 곧
"짙은 계통의 정장차림"인 것처럼 잘못생각케 했던 것인만큼 공무원들이
자율적으로 "단정한 복장"의 참된 의미만 되찾으면 되는 것이지 별로
새삼스런 일은 아니다.
"마음씨가 고우면 옷 앞섶이 아문다"는 속담이 있다.
아름다운 마음씨는 그의 옷차림에도 나타난다는 뜻이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역시 겉옷보다는 공복임을 자부하는 마음씨가 더
중요하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3월 21일자).
추울때와 더울때 등 명분이나 계절에 따라 바꿔 입어야 하는 관복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조복 제복 길복 군복등 그 종류만해도 무려 열가지나 됐고 그 가운데
여덟가지가 추울때와 더울때 입는 옷이 달랐다.
게다가 당상관과 당하관등 직품에 따라 다른 옷이 네가지나 됐다고 하니
제대로 구색을 갖추려면 수십벌의 관복이 필요했다.
조정의 대관은 관복이 없으면 공무에 나설수 없었다.
빚을 내서라도 관복을 마련해야 했고 그것도 여의치 못한 사람은 남의
것을 빌려서라도 입어야 했다.
"매양 조회와 제형때가 되면 관복을 구걸하는 사람때문에 다투어 오고
심부름하는 사람이 길에 서로 오가며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면서 다만
얻지 못할까 두려워하니 이것이 과연 무슨 법이겠습니까"
다산 정약용이 관복제도의 폐해를 지적한 "공복의"에 이렇게 적어 놓은
것을 보면 쥐꼬리만한 록을 받아 여러가지 관복을 다 마련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빌려다 썼던 당시의 딱한 정황이 짐작된다.
옷에 대한 다산의 생각은 실학자답게 극히 실용적인 면에 치우쳐 있다.
그는 옷의 용도가 한가지는 몸을 따스하게 하는것이고 다른 한가지는
귀천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따라서 옛날에는 우리 옷이 아주 단순하고 간편했는데 중국과 오랑캐의
복식이 덧붙여져 너저분하고 자질구례한 것에까지 신경을 쓰게 된
것이라면서 길복과 군복만 남기고 모두 없애버려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길복과 군복도 검소하고 간편하게 다시 만들어 비용을 줄여야만 관리도
탐욕하지 않고 백성도 해를 당하지 않게된다는 것이 다산의"공복의"의
결론이다.
당시 이같은 다산의 선구적 생각이 관복의 간소화에 어느정도 영향을
주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양반복식에 따라 바지저고리 위에 두루마기를 입고 그 위에 다시
도포를 입었던 서민복식의 흐름이 반상의 구별없이도 도포가 없어지는 등
평등화되고 간소화된 것은 실학사상의 영향이 컸다.
총무처가 공무원복장을 자율화하기로 하고 전부처에 자율화를 권장키로
했다고 한다.
과거 정권의 획일화된 사고가 "품위를 유지할수 있는 단정한 복장"이 곧
"짙은 계통의 정장차림"인 것처럼 잘못생각케 했던 것인만큼 공무원들이
자율적으로 "단정한 복장"의 참된 의미만 되찾으면 되는 것이지 별로
새삼스런 일은 아니다.
"마음씨가 고우면 옷 앞섶이 아문다"는 속담이 있다.
아름다운 마음씨는 그의 옷차림에도 나타난다는 뜻이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역시 겉옷보다는 공복임을 자부하는 마음씨가 더
중요하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3월 21일자).